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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 영화 2[변영국의 세상만사 인생사]

겨울이 되고 첫 눈이 내리고 하면 먼저 생각나는 영화가 철도원이라는 제목의 일본 영화다. 다카쿠라 겐의 기품 있고 묵직한 연기도 좋았고 사실과 환타지를 능청스럽게 버무릴 줄 아는 감독의 연출도 좋았으며(그 영화에는 아주 예쁜 유령이 나오는가 하면, 심금을 울리는 대사가 진행될 때는 어김없이 효과 음악이 깔린다. 말하자면 리얼리티가 없는 것인데 보는 이들은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게 되는 뭐 그런 것...) 쓸데없는 대사를 남발하는 따위의 저질스러움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허나, 내게, 그 영화가 준 최대의 선물은 바로 ‘눈’이었다. (그저 모호하게 출연하는 주인공 ‘유키코’는 ‘눈의 아이’라는 뜻이란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이며, 가슴 깊이 가라앉아 있던 유년의 추억을 헤집어 놓는 설레임이었던지.... 어린 시절 과자를 나누어 주던 시골의 작은 교회와, 그 교회에 가득 덮인 눈과, 예쁜 주일학교 선생님과, 밤새우며 깔깔대던 크리스마스 이브가 몽땅 떠오르는 행복함을 나는 그 영화를 보며 만끽했었다. (허나 내 눈에서는 눈에 묻혀 죽어가는 주인공의 운명을 슬퍼하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말하자면 나는 울면서 행복해 했었다. 이런 세상에.. 엽기적이다)


그리고 ‘눈’이 생각나는 또 하나의 일본 영화가 있으니 바로 ‘나라야마 부시코’다. ‘나라야마 부시코’에서의 눈은 ‘철도원’에서의 그것과는 정반대로 다가왔다. 슬펐다. 그리고 전율스러웠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라는 이름은 많이 들었고 그의 영화도 꽤 접했던 터였지만 이런 무시무시한 사실주의 영화가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가 두려웠던 기억이 난다.

나이가 칠십이 되면 자연스럽게 나라야마라는 골짜기에 가서 죽음을 맞아야 한다는 설정 자체가 비극인데, 더 비극인 것은 주인공 오린 할머니가 예순 아홉인데도 아직 이빨 하나 빠지지 않고 정정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오린 역을 맡아 열연한 배우의 그 연기.... (나는 그녀가 누군지 몰랐고 지금도 그 이름을 외우지 못하고 있다)

빨리 나라야마에 가서 식구들을 위해 입을 하나 줄여야겠는데 그놈의 이빨이 문제다. 오린 할머니는 돌절구에 자신의 이빨을 사정없이 부딪는다. 그리고 매우 만족스럽게 헤벌쭉 웃는 그 몸서리쳐지는 연기, 그리고 앞니가 몽땅 빠진 그 코믹한 입의 모양, 그 슬픔..

지게에 어머니를 태우고 출발했으나 마음이 약해서 차마 나라야마에 모시고 가지 못하는 아들을 무섭게 몰아쳐서 결국 골짜기에 당도하는 과정의 그 표정, 그 무서움,

그리고 나를 눈물짓게 했던 바로 그 장면

스스로 죽으러 가는 길인데 아들의 배가 고플까봐 한사코 주먹밥을 거절하는 모정, 자신이 죽게 될 골짜기가 눈앞에 보이는데, 비탈에 미끄러져 다친 아들의 발가락을 약초로 감싸주는 슬픈 모정. 그 무심한 표정에 숨어 있는 희생, 온 존재를 던짐.....

그리고 그렇게 혼자 남겨진 오린 할머니의 머리 위로 까마귀가 날았고 눈이 내려앉았다.


철도원에게는 철도가 삶이자 전부였다. 그래서 딸의 죽음도 지켜보지 못했고 아내의 죽음도 지켜주지 못했다. 딸이 죽고, 아내가 죽는 그 순간 철도원은 자신의 기차역에서 출발을 알리는 수신호와 구령을 붙이고 있었다. 그 모든 슬픔을 그저 무표정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던 철도원은 자신의 기차역 플랫폼에서 눈에 묻혀 죽어간다. 그 죽음은 그의 고집스런 인생에 걸 맞는 죽음이기도 하고 딸과 아내를 그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보여주는 죽음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시종 여일 내리거나 쌓여 있거나 아니면 옷자락에서 털어져 나가는 눈들은 정말 아름답다.

그리고 나라야마 부시코.....

오린 할머니 역을 맡을 배우는 놀랍게도 자신의 생 이빨을 실제로 부러뜨렸다고 한다. 하긴 그 역할을 온전히 소화해 내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나 정말 연기를 잘했다. 생 이빨을 부러뜨리는 처참함은 그녀가 그 역할을 소화 하는 데 들였을 온 몸의 힘과 정신적 에너지를 생각하면 아마 별 것 아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각설하고....

바야흐로 눈 내리는 겨울이 돌아오고 있다.

‘허접 쓰레기 같은 선거만 아니라면 온전히 즐거울 겨울인데...’ 하고 생각하니 참 골이 난다. TV만 틀면 삼류 약장수들의 되도 않은 소리들이 난무하고 교차로에서는 어김없이 확성기가 소위 난리를 치고 있다. 듣기싫다. 정말 싫다....


신경질 난다.

이럴 때 나는 ‘나라야마 부시코’의 오린 할머니와 ‘철도원’의 주인공인 철도원 ‘오토’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눈’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영화가 실제가 되고 실제가 영화가 되는 기적을 베풀어주십사고 하느님한테 기도한다. (우리나라가 일본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오해 마시길..)

물론 하느님께서는 되도 않은 얘기 하지 말고 정신 차리라고 하시겠지만 말이다.

 

 

/변영국 2007-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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