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국의 세상만사 인생사]

나는 냉면이 너무 좋다. 빨간 양념의 홍어회를 얹어 먹는 회 냉면도 좋고 시원하게 들이켜면 오장 육보는 물론 온 정신까지 두루 개운해지는 물냉면도 좋다. 인천에서 자주 맛보는 백령도 식 냉면의 까나리 액젓 맛은 또 어떤가?
아무튼 나는 냉면이 너무너무 좋다.
그리고 냉면을 먹을 때면 늘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그리고 만두도 좋다. 나는 만두를 거의 달인의 솜씨로 만들 줄도 안다. 해마다 설날이 되면 내 마누라하고 딸네미는 내가 만든 어른 주먹만한 김치만두 먹을 생각에 고향으로 출발하는 차 안에서 벌써 입맛을 다실 정도다.
그리고 만두를 빚을 때도 어김없이 아버지가 생각난다.
참 그 양반...
돌아가실 때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고 심지어 슬프지도 않았는데 세월이 갈수록 더해지는 나이만큼이나 그리움과 슬픔의 더께가 층층으로 내려앉는다.


아버지는 한글을 모르셨다. 물론 숫자도 몰랐고 때때로 은행 일이라도 보시려면 마치 돈이라도 빌리려는 듯한 미안한 표정으로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자식 가르쳐서 워따 쓰겄어. 나랑 저어기 은행에를 가야겄는디 시간이 있남?”

집에서 테레비나 보고 있던 중학생이 시간이 왜 없겠는가. 못 배운 아버지는 그렇게 자식에게 항상 미안하셨다. 그 미안함은 그대로 은행으로 이어져서 으리번쩍 광나는 은행의 참 반듯하게 차려 입은 양복쟁이들 틈에서 고개도 못 들고 헛기침만 해 대시던 기억이 난다. 그럴 때 아버지는 언제나 나의 등 뒤에 서 계셨다.

‘나는 몰러두 내 아들은 아마 당신네덜 보다 똑똑하면 똑똑했지 무식허진 않을규’ 속으로 분명히 이렇게 외치셨을 아버님에게, 나는 말하자면 우리 집의 대표선수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대표선수를 믿고 또 믿었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셨다.


아버지는 참 옹골차게 자수성가 하신 분이다. 이름만 대면 지금도 알만한 서울의 큰 요리집의 주방장까지 지내셨으니 말이다. 물론 글을 몰라서 총 주방장은 따로 있고 말 그대로 주방장이셨지만 음식 솜씨는 장안에 꽤 이름 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주 전공이 바로 냉면이었다. (물론 만두 역시 아버지의 감수를 받아야 손님상에 나갔다)

학교가 파하고 가끔 냉면이 생각나서 아버지가 일하시는 식당에 가면 아버지는 고춧가루가 묻어 있는 위생복을 아들에게 보이면 안 된다고 주방에서 나오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버지 대신 나온 냉면은 편육이 예닐곱 장은 되고 냉면 가닥 또한 엄청 많아서 흘리지 않고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양이었고 그것을 다 먹을 때 까지 아버지는 음식을 내 주는 주방 배식구를 통해서 나를 바라보셨다. 그러시다가 냉면을 다 먹고 트림을 한 바탕 하면 그제서야 빙그레 웃으시고는 당신 일을 보시러 안으로 들어가셨다.

위생복을 입고 있는 한 아버지는 왕이었다. 나는 그게 좋았다. 허나 아버지는 일생동안 그 고춧가루 묻은 위생복을 창피하게 여기셨음이 분명하다. 그게 바로 나이 오십이 되어가면서 느끼는 나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의 알맹이다. 참 슬프다...

고입 학력고사를 잘 봐서 아버지가 매우 기뻐하셨던 그 해 성탄절이었다. 1976년이었으니 성탄절이라고 해서 뭐 딱히 즐기거나 선물할 것이 있지도 않았고 그저 조잡한 선물 세트가 주종이었던 그 시절, 여느 때처럼 10시가 넘어 집에 들어오신 아버지는 뒤에 커다란 자루를 메고 계셨다. 빨간 옷을 걸치지 않은 산타클로스였다.

“긍께 쿠리마스? 그랴. 그 쿠리마스에는 싼타키 할아버지가 이렇게 허는겨 이눔아.”
내 생전 처음 본 아버지의 개그.... 그리고 엄마의 면박
“아예 빨간 내복이라도 입지 그랬수. 어이그”
아버지는 싱글거리면서 약 3km에 달하는 퇴근길을 어깨에 자루를 메고 걸어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 자루에서는 아버지가 직접 빚으신, 말하자면 서울 장안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만두가 산더미처럼 들어 있었다.
“아버지 이거 다 먹으면 배 터져요”
“뒀다가 생각나면 먹고 허란 말여 다 먹지 말고. 겨울이라 얼던 않을껴”
끓여 먹고 쪄 먹고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참 맛있는 만두였다.


일자무식 우리 아버지....
그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을 하게 해 준 그 때의 사람들이 참 고맙다.
못 배우고 무식하다고 내동댕이치지 않고, 3D 업종이라고 천대하지 않고...
“변씨 아들이 똑똑하다며? 변씨는 정말 좋겠어” 라고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덕담으로 아버지의 기를 살려준 그 시절의 이웃들이 정말 고맙다.

덕담이 넘치고 애정이 넘치는 사회....
원래는 우리 것이었던 그 사회가 그립다.
그리고 살아계신 아버지의 모습을 정말이지 단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

/변영국 2007-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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