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한 걸음, 산티아고 가는 길-1]

▲산티아고 가는 길

      용산참사 현장에서 이현주 목사와 드림예배를 드리던 어느날, 문득 '그녀'를 만났습니다.
     "진리에 순종한다"는 뜻으로 '순진'이란 이름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녀가 지난 해 산티아고엘 다녀왔다더군요.
     발에 알 수 없는 통증을 느끼는 그녀는 '순진한 걸음으로' 천천히 그곳엘 다녀와서 글을 썼습니다.
     기고를 부탁했더니, 개인적 이야기라 쑥쑤러워서 ..망설이더군요.
     이제 어느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책으로 낼 준비를 하고 있답니다. 
     그녀가 산티아고를 통해 '자기를 찾아가는 순례이야기'를 몇 자락 꺼내어 6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 한상봉

목소리

8년 전 어느 빈 강의실, 내 가슴이 미친듯 두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연금술사>라는 매혹적인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이었다. 아직은 내게 허락되지 않은, 몹시도 중요한 비밀을 엿본 것만 같았다.
보물을 찾아 길을 떠난 양치기 산티아고 이야기.

책에 매료된 나는 여기저기 그 책을 사다 안기고, 만나는 사람한테마다 그 이야기를 하며 설레어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목동이 걸었던 그 길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언젠가 한 번 저 길을 걸어 보았으면……. 막연한 꿈을 내 마음밭에 은밀하게 심었다.
여러 해가 흘렀고, 그런 꿈을 꾸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렸을 즈음 나는 소원하던 인생의 스승을 만났고 우연히 그분과 '산티아고의 길'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님은 그 길을 걷겠다는 생각이 '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닐 터이니 잘 관찰해보라고 하셨다. 언젠가 떠나게 될 것이라고도 하셨다. 하지만 나는 웃어넘겼다.

나는, 벌써 이십 년이 훌쩍 넘게 한쪽 발목이 불편해 제대로 움직이기 어렵다. 열 몇 살 이후로는 달리기를 해본 적도 없고, 오래 걷거나 서있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 미칠듯한 통증으로 잠못드는 날이 십 수 년째 계속되었다. 용하다는 병원은 다 찾아다녀 보았지만 치료법은커녕 통증의 원인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뼈, 근육, 피, 신경 모든 게 정상이라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이 통증만이 내가 정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 이 플라마리온 목판화는 작가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목판화로 까미유 플랑마리옹의 L'atmosphère: météorologie populaire (1888) 의 책에서 일반 청중을 위한 천문학을 설명하는 곳에서 첫 등장 했다. 이 사진은 인간이 지구의 대기를 뚫고 보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나의 사춘기는 오로지 집과 병원을 오가며 보낸 기억이다. 고등학교 다닐 무렵 통증의 양상이 암과 같다고 분류되어 나는 암을 앓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치료를 받았다. 낫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어보기 위해 통증 치료를 받던 말기암 환우들이 많아 병동에서는 항상 무겁고 어두운 기운이 흘렀다. 같이 치료받던 사람들이 수술실로 들어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날 복도에서 수술실로 들어가는 간암 환우 아주머니를 마주쳤다. 얼굴이 까맣고 임산부처럼 배가 부푼 아주머니는 뜻밖에도 평온한 얼굴이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곧 끝나게 될 아주머니가 부러웠다.

열여덟 살 어느 봄, 척추 속에 약물을 투입해 교감신경을 마취시키는 시술을 다섯 번째 끝낸 의사는 부모님께 내 오른쪽 감각 신경을 절제하자고 권했다. 겨드랑이부터 허벅지까지 옆구리를 갈라 감각신경을 인두로 지져 없애는 수술이라고 했다. 사망률이 50%에 이르지만 이 수술을 받지 않는다 해도 내 심장이 두 달을 버텨내기 힘들 거라고 했다. 이미 나는 먼젓번 시술에서 두 번이나 심장이 멎은 터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아버지는 나를 퇴원시켜 집으로 데려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두 달이 지나도 나는 살아있었다.

심장이 멎을 듯한 발작과 통증은 덜했지만 나는 내가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늘 기억했다. 이후로 내 삶의 중요한 선택과 결정은 ‘두 달 뒤에 내가 죽는다면’이라는 가정 하에 이루어졌다. 가족과 친구들이 만류하던 영화학과에 진학한 것도, 휴학을 하고 돈을 모아 배낭여행을 떠난 것도 내겐 목숨을 건 선택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통증이 오면 그저 견디는 것, 조금 덜 고통스럽도록 평소에 조심하는 것, 그렇게 사는 데까지 살아보는 것, 그 뿐이었다.

그런 내가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다니! 선생님이 내게 희망을 주려고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곧 그 이야기도 잊어버렸다.

어느 가을 새벽녘, 별안간 내 속에서 '학교를 그만두어라!’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중학교 특별활동 시간에 아이들에게 영화를 가르치고 있었다. 보통 사람 반의 반도 못미치는 내 체력이 감당할 수 있는 드물고 귀한 일인데다가 먹고 살 돈도 마련해주는, 내겐 꼭 필요한 일이었다. 나는 말도 안된다며 고개를 젓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곤 그 목소리를 무시해버렸다.
가을이 깊어가고 겨울이 찾아올 무렵, 내 안의 목소리는 이제 '길 위에 서라!'고 내게 명령했다.

말도 안돼, 미쳤어, 계속해서 목소리를 무시하고 눌렀지만 목소리는 날마다 커져 귓바퀴에서 윙윙대기 시작했다. '산티아고로 떠나라, 산티아고로 떠나라!…'

▲까미노 루트
그래, 내가 졌다!
나는 일을 그만두었고, 산티아고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매일 배낭을 지고 걸을 수 있는 체력이 급했기에 헬스클럽도 다니고 남들처럼 등산화도 길들여야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겨우 내 날마다 약을 먹고 뜸을 떠도 동네 한 바퀴 제대로 돌 수가 없었다. 아, 이래서 나 떠날 수는 있는 걸까. 떠나라고 하던 목소리는 나를 흔들어놓고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나는 기도했다. '신이시여, 정말 제가 떠나야 하는 길이 맞다면 신호를 주십시오.'

겨울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봄볕이 어슴어슴 찾아오던 어느 새벽, 꿈을 꾸었다.
피카소가 내 엄지손톱을 칼로 슥슥 깎더니만 왼손 엄지 위에는 보름달을, 오른손 엄지 위에는 십자 모양으로 생긴 조가비 장식을 달아주고는 '이것들이 네 갈 길을 지켜줄 징표'라고 했다. 손톱 위의 장식들은 황금처럼 햇빛처럼 노랗게 반짝거렸다.

아직 나는 두려웠다.
하지만 더 망설일 것이 없는 꿈이었다.
나는 파리행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2008년 3월 10일)


초대

떠나기로 마음먹고 나니까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아졌다.
등산을 해본 적이 없어 등산화나 가벼운 배낭, 등산용 점퍼도 하나 가진 게 없었다.
뭣보다 급한 건 등산화였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 대부분이 자갈길이라고 들었다. 비가 내리면 온통 진창으로 변하기도 하고, 소똥이나 양똥을 즈려밟고 가는 길도 많다고 했다. 사람들의 경험에 비추어 단연코 바닥이 두꺼운 경등산화가 제일 적합해 보였다. 그러나 손쉬운 결론에도 불구하고 그 결론이 내게까지 해당되진 않았다. 내가 아픈 부위가 발목, 정확하게는 복숭아뼈 뒤쪽 아킬레스건 부위였기 때문인데 대부분 편한 신발들은 발목을 보호하기 위해 신발 뒤축이 아킬레스건에 닿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등산화나 트레킹화, 심지어 에어가 달린 운동화까지도 아픈 발목을 자극하지 않는 신발이 없었다.

여러 날 신발을 찾아 헤매던 나는 점점 풀이 죽어갔다. 신발 하나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내가 어떻게 그 먼 길을 걸어간단 말인가, 막막하고 아득하고, 어쩐지 누군가 막 원망스러워졌다. 나는 가고 싶지 않은데 누가 계속 등을 떠미는 기분이었다. 아니면 산티아고의 길 어딘가 붙박힌 강력한 자석이 나를 끌어당기는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팔자 좋게 세월아 네월아 여행가는 나를 부러워했지만 신발 하나 찾지 못해 완전히 절망한 내 속을 버선목처럼 뒤집어라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기를 여러 날, 어쩌면 신발이나 가방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발 때문에 더 못가겠으면 갈 수 있는 데까지만 가면 된다. 적어도 나는 800km를 완주해야 한다거나, 하루에 2-30km씩 주파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으니까. 스승님 말씀마따나 산티아고는 거기만 있는 게 아니라 여기도 있는 거니까. 이만하면 됐다 싶을 만큼 내 속도대로 느릿느릿 산보하다 온다고 치자.

▲안성맞춤 등산화
이런 마음으로, 편한 단화라도 한 켤레 사야겠다 싶어 친구랑 백화점에 갔다. 운동화만 모아놓은 매장이라고 해서 따라나섰던 건데 거기서 뜻하지 않게 등산화를 한 켤레 발견했다. 여느 등산화와 달리 뒤축이 아킬레스건에 닿지 않는, 운동화처럼 생긴 등산화였다. 등산화 만드는 회사가 아닌데 그 넓은 운동화 매장에 딱 한 켤레, 그것도 내 치수가 있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날 위해 예비된 것이었다.

그 등산화를 신고 길들이는 동안 날 위해 예비된 것들을 차마 우연이라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만났다.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책도 그랬고 기능성 등산 점퍼도 그랬다. 이미 나보다 먼저 이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한 누군가가 때에 맞게 그것들을 내 손에 쥐어주고 있었다. 무딘 내가 확실히 알아챌 수 있도록.

문득 이 여행이, 내 의지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길이 나를 초대했다는 느낌이 아주 강렬하게 다가왔다. 나를 초대한 그 길이,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알아서 다 준비하고 있다는 확신이 점점 강해졌다. 나는 그냥 마음 편하게, 고마워하면서 기다리면 되는 것 같았다. 그러자 밤마다 계속되는 통증도, 불면증도, 하루 한 끼 소화하기 힘든 위장도 걱정되지 않았다. 체력도, 언어도, 준비하지 못했다고 불안해할 것이 없었다.

어쩌면 '포기'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나는 나 자신과 여행에 관한 모든 것을 그냥 내어맡겼다. 나를 그리로 부른 누군가에게- (2008년 3월 25일)

 

길 떠날 준비

그다지 태평스러운 성격이 아닌데 이상하게도 이번 여행엔 도무지 불안이 느껴지지 않았다. 불안과 긴장 속에 20년을 살아온 내가 하나도 불안하지 않은 여행이라니. 아이러니했지만 사실이었다.
사람들이 내게 준비 잘 하고 있느냐고 물어오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가방과 옷과 신발은 샀고, 간단하게 필요한 물건도 있는데 뭐가 준비인지, 여기서 무얼 더 준비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떠날 때가 되니까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많아졌다.
그동안 내 상처만 들여다보기 바빠 전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던 다른 사람의 아픔과 사연들이 이제와 보란듯이 자기 존재를 드러냈고 내가 길 위에서 찾아와야 할 보물이 무엇인지 신문기사, 책, 사람들이 떠들어 주었으며 내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드라마, 책, 사람들이 이야기해 주었다. 살면서 이렇게 강렬한 메시지를 연속해서 받아본 적이 없다. 기승전결이 완벽하게 짜인 소설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랄까.

떠날 날이 임박했는데도 난 이 '마음'의 준비밖엔 되어있지 않았다. 사람들 만나서 떠난다고 소문내고 밥 얻어먹고 정신을 차려보니 아뿔싸, 비행기 타기 아홉 시간 전이다. 이제 네 시간 뒤면 공항으로 가야하는데 아직도 떠난다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

내 여행을 지지해준 모두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내가 아픈 것을 누구보다 가까이 지켜봐온 친구들이 이구동성 이 여행을 지지하던 터라 누구 하나라도 반대하면 그 빌미로 주저앉을 비열한 생각까지 했지만 그래도 정하연, 네 덕분에 정말 이 여행이 내게 필요한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어.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떠나기도 전부터 벌써, 그대들이 그립다. (2008년 3월 31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김순진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쓰며, 어린이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순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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