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8월 30일자 1032호 <평화신문>과 2661호 <가톨릭신문>이다.

▲ 교계신문 제호

이번 주 교계신문 모니터링을 하려는 참에 교계언론의 ‘미보도’ 혹은 ‘기사가치’ 판단에 관한 것이 이슈화 되었기에 그 문제에 대해 말하려한다. 원래 싸움이나 다툼에 있어 때리는 사람보다 말리는 사람이 더 밉다는 말이 있듯이 어쩌면 이번 비평은 미운 일을 자초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에 있어 선후는 가려야 하고, 시비는 바로 해야 하기에 필자의 의견을 내는 것이다.

때로는 글자 하나 틀린 것까지 지적해대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언론과 교회>라는 자리다. 그것도 벌써 2년이 넘도록 한 주간도 빼지 않고 교계신문의 보도에 청하지 않은 비평을 마다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딱 한 가지, “교계언론 문 닫으라”는 것이 아니라, “교계언론 멋지게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80여년 역사의 <가톨릭신문>과 20여년 역사의 <평화신문>이 가야 할 길이며 한국천주교회 언론이 할 일이기 때문이다.

이미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보도한 대로「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원」이 지난 6월 15일 서울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연구원이- 2009년 기쁨과 희망의 날, ‘교회의 사람’을 찾아서- 행사를 한 바 있다. 특별히 연구원이 올해 ‘교회의 사람’으로 선정한 사람은 윤형중 신부였다. 연구원은 윤신부의 선종 30주기를 맞아 추모미사와 함께 여러 사람의 발제를 통해 윤신부의 열정적 삶을 알리려 했다. 연구원은 이와 관련하여 각 언론사의 종교·문화 담당 기자들에게 보도 자료를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교계언론이 왜 이 행사를 다루지 않았는가가 새삼 불거진 것이다. 연구원은 이에 대하여 지난 7월 말에 해당 언론사에게 연구원 이사장 명의의 서신을 전했다고 그들의 홈페이지를 통해 알렸다.

▶교계신문은 연구원보다 먼저 윤형중 신부를 알아봤다?

▲ 윤형중 신부
<가톨릭신문>은 지난 2006년 10월 29일자 2522호에서 윤형중 신부를 집중적으로 기획보도 한 바 있다. <가톨릭신문>은 당시 특집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103번째를 보도하면서 윤신부를 ‘사회운동가 및 제3세계’의 9번째 해당자로 선정하였다. 보도문에서는 그를 “교회언론과 출판을 이끈 선각자, 일제압박-재정난 견디며 사회복음화에 헌신, <가톨릭 청년>창간, <경향신문> 사장으로 활동” 등으로 부제를 뽑았으며, 그가 선종시 두 눈을 남긴 사실과 함께 “가톨릭의 투철한 논객이며 유신독재에 반대하며 민주회복국민회의 상임대표”를 맡은 사실을 알렸다.

그런가 하면 <평화신문>은 이보다 앞선 1999년 12월 19일자 558호에서 연말특집으로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가톨릭인물 10인’을 선정하였다. 그 때 <평화신문>의 선정기준은 보는 이마다 다를 수도 있겠지만 평신도 중에서 ‘서상돈, 안중근, 장면, 정지용, 김홍섭’을, 성직자 중에서는 ‘방유룡, 윤형중, 윤을수, 선종완, 지학순’을 선정하였다. 이때 <평화신문>은 윤신부에 대하여 “언론을 통해 겨레복음화·인권수호에 힘써”를 부제로 뽑으며 “언론·출판, 교리강좌, 인권과 자유 수호, 순교자현양”등의 사목여정을 소개 한 바 있다.

▶기사선택이 편집권 독립이다?

교계신문사들에게 몇 십 년 지난 빛바랜 그들의 창간 이념을 기억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의 편집권 독립이다. 물론 사외에 있는 사람이 해당 신문사의 편집권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 방법이 없다. <한겨레>를 비롯한 몇몇 언론사들이 회사소개 페이지 등에 편집권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지만(이른바 보수신문은 없다), 교계신문은 어디에서도 그런 설명을 찾아 볼 길이 없다. 현재 언론이 말하는 편집권은 사실 언론보도의 전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신문의 편집권에 대한 논란은 신문이라는 매체가 생긴 이래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일반 보수신문들에게 있어 ‘언론의 자유’라는 말은 ‘사주의 자유’라는 말과 같다고 말한다. 10년 전에 <평화신문>이, 3년 전에 <가톨릭신문>이 한국가톨릭 10대 인물이며 역사속의 그리스도인으로 선정한 인물의 30주기를 맞아 한 연구원의 추모미사와 추모행사가 기사가치가 없다고 판단한다면 분명히 무언가 잘못된 일인 것이다. 더욱이 그것이 불편했다면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오히려 이런 일은 언론사가 스스로 찾아서 할 행사였지 않았을까?

▶고민해야 할 때가 지나간다.

사실 이번 문제는 추모의 대상이었던 윤형중 신부의 생애에 대한 조명이 본질이었지만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원」이 제기한 ‘행사’에 대한 교계신문의 ‘언급 없음’은 고의적 배제인가? 단순 미보도인가? 기사가치 절하인가? 결국 이 문제는 한국천주교회와 교계신문 시스템이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이번 문제를 제기한 연구원의 원장신부가 <평화신문> 초대사장을 역임하였기에 이에 대한 고민들이 체계적이고 ‘교회적’으로 서로 논의되길 바란다.

교회의 기관지임을 자임하고 있는 <평화신문>과 <가톨릭신문>의 경영권과 편집권 그리고 독자에 대한 기사제공에 대한 연구와 고민은 언제해도 늦지 않다. 당부하고 싶은 한 가지는 두 신문사 모두 ‘언론!’이라는 것에 대한 성찰이다. 출발의 관점은 정해진 것이다. 언론이 도대체 뭘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김유철(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경남민언련 이사,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