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30

“이분 말고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또 다른 이름은 하늘 아래 없습니다.”(사도4,12) 

위 인용문은 그동안 다른 종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배타성을 정당화해온 대표적인 성서 구절일 것이다. 얼핏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옹호하기 위한 단호한 선언문 같기도 하다. 그런데 위 구절에는 실제로 다른 종교를 배타하려는 의도가 일부라도 들어있는 것일까? 위 구절의 전후 맥락을 조금만 눈여겨본다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가 유일한 구원자라는 의미가 함축적으로 들어있는 듯 하기는 해도, 다른 종교들에 대한 배타성까지 뜻하는 말은 전혀 아닐 뿐더러, 여기서 말하는 ‘구원’도 특정인이 독점하는 ‘사후 천국’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구원’이 무엇인지부터 정리해보자. 

구원이라는 말 

성전 문 곁에 앉아서 구걸하던 태생 앉은뱅이가 있었다. 기도 차 성전으로 올라가던 베드로 일행이 그를 불쌍히 여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해주었고, 난생 처음 걸을 수 있게 된 앉은뱅이는 성전으로 걸어 들어가 하느님을 찬양하며 기뻐했다.(사도 3,1-10)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고 놀라워하며 베드로 일행을 쳐다보자 베드로가 응수했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왜 이 사람을 보고 놀랍니까? 왜 우리를 유심히 쳐다봅니까? 우리 자신이 무슨 능력이 있거나 경건해서 이 사람을 걷게 하여준 줄로 생각합니까?......보시는 바와 같이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은 바로 그 예수의 이름으로 낫게 된 것입니다.(3,12;16) 

그 사건 뒤 유대교 사제 및 사두가이파들이 예수 부활을 전하고 다니던 베드로를 붙잡아 대사제 앞에 세워놓고는 앉은뱅이 치유 사건도 거론하며 이렇게 심문을 했다: “당신들은 무슨 권한과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4,7) 그러자 베드로가 답했다: 

오늘 여러분이 우리가 병자에게 선한 일을 한 사실과 그가 어떻게 치유되었는가 하는 경위에 관해서 심문을 하는데, 병자였던 저 사람이 성한 모습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바로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힘입어 된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입니다. 여러분과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은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분 말고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4,9-10; 12) 

제자의 힘이 아니라 예수 이름의 힘 

베드로의 말에 담긴 일차적 의미는 병자 치유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담긴 힘 덕이라는 것이다. 그 이름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을 통해 앉은뱅이가 치유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파생된 신학적 의미로 ‘구원’(soteria)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막연하게 상상하듯 사후 천국 왕생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사실상 병자의 치유, 병이 나아 몸이 성해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에 해당하는 영어 salvation이나 독일어 Heil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가령 salvation은 라틴어 salvatio에서 나왔고, salvatio는 전체성, 건강, 안녕 등을 의미하는 salus를 어근으로 한다. 사도행전에서는 ‘구원’이라는 말을 특별한 교의적 의미 없이 다양한 각도에서 사용하는데, 때로는 평화나 생명 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전후 맥락을 살며보면 이 문장에서의 ‘구원(soteria)’은 앉은뱅이가 치유된 사건을 의미할 뿐이다.

“이분 말고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받을 수 없다(4,12a)고 할 때의 ‘구원’은 그 직전에 베드로가 말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은 바로 그 예수의 이름으로 낫게 된 것입니다.”(3,16)라고 할 때의 그 “낫게 됨”과 다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구원이란 일차적으로 지금 온전해짐, 불완전한 몸의 치유를 의미하며, 그 치유 내지 온전하게 하는 능력이 베드로가 아니라 바로 예수의 이름에 있다는 것이다. 

교리언어가 아니라 행위언어 

당시 유대교 지도부 상당수는 예수에게 ‘구원’의 능력과 권리가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3,13) 그렇지만 예수에게서 새로운 종교적 정체성을 발견한 제자들, 특히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추종하게 된 이들은 예수의 ‘구원자’로서의 정체성에 ‘올인’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를 정죄해 사형에 처한 이들이 다시 교회의 지도자 베드로를 심문하며 옥죄는 상황에서(4,10) 예수에 대한 신앙적 확실성을 적당한 타협으로 회피하거나 포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위와 같은 다소 확신에 찬 문장을 통해 예수를 따르고 치유하는 ‘행위’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그것이 예수 이름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4,12b)

물론 이것은 일차적으로 예수의 이름에 담긴 치유 능력을 강조하는 말이지, 다른 종교를 폄하, 부정, 저주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폴 니터가 해설하고 있듯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다”는 말은 예수가 유일한 구원자라는 사실에 대한 철학적이거나 교의적인 정의를 내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누구든 자신들처럼 예수에 헌신하기를 바란다는 실천적 요청 혹은 행위적 언어였다.(폴 니터, <예수와 또 다른 이름들>, 유정원 옮김, 분도출판사, 2008, 109-110쪽) 

내몰지 않고 따르게 하려는 

당연히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은 없다”고 할 때의 그 “다른 이름”이란 불교, 유교, 이슬람과 같은 종교들의 신앙 대상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심문관 앞에서 예수에게서 구원의 힘을 얻으면 사는 자신들의 신념을 강조하며 변론하기 위한 언어일 뿐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 다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은”(사도 10, 34-35) 베드로가 어찌 다른 종교를 저주하거나 다른 능력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가르치고 선교했겠는가. 바울로가 그리스인들의 다양한 종교관을 포용하며 아레오파고 법정에서 변론했듯이, “사람들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자 “사람들이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하느님(사도 17,22-27)을 믿는다면서 어찌 다른 이름을 무시하고 봉쇄하고자 했겠는가.

예수의 이름을 부정하는 유대교 지도자들 앞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태생 앉은뱅이를 치유한 사건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그렇게 치유하는 주체인 예수의 이름에서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찾으며, 그 예수의 능력 안으로 다른 이들을 인도하려는 간절한 마음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예수의 유일성을 내세워 사람들을 내몰려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모두 예수를 따르게 하기 위한 의도의 표현이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교 역사상 똑똑하다는 신학자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어찌 이 정도의 한 두 구절로 다른 종교적 가르침을 일거에 무시하는 근거로 삼고 실제로 수많은 죽임의 역사를 이어오게 되었는지 교회사 내지 선교의 역사 그 어두운 부분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질 않는다. 사실은 그런 뜻이 아니라며 바로잡아줄 용기가 없었던 탓이라는 단순한 사실만 분명할 뿐.

이 때 구원과 관련하여, 그리고 성서 전체를 관통하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낱말이 있는데, 바로 예수의 “이름”이다. 당시 사용되던 “이름”의 중요성을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거나 간과하는 경향이 있는데, 다음에는 성서에서 자명하게 수도 없이 사용되는 “이름”의 의의 및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이찬수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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