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국의 세상만사 인생사]

뉴스 시간이 되면 TV를 끄기 시작한 지 꽤 된 듯하다. 얼굴에 개기름이 흐르는 정치인들과 그들의 삿대질을 보는 것이 정말이지 늦은 저녁, 거리 한 귀퉁이에 쏟아져 있는 토사물을 보는 것 보다 더 역겨웠기 때문인데 그런 연고로 아침마다 받아보는 신문의 정치면에는 아예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 뿐인가. 친우들이나 선배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누가 정치 얘기라도 할라치면 그만 하자고 얘기하여 자리를 썰렁하게 만들기도 하고 그래도 그 얘기가 지속되면 가차 없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통에 모난 놈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참 많이 들었다.

그러면서 마치 내가, 몹쓸 얘기를 들었다고 강물에 귀를 씻었다는 옛날 중국의 선각이라도 된 냥 매번 의기양양했다. 독야청청한 줄 알고 오만방자 했다. 아 창피하다.

예전에 김수영과 황동규를 제법 좋아했었다. 그래서 오늘 불현듯 ‘시여 침을 뱉어라’고 절규하던 김수영 시인의 책을 읽고 싶어졌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중간고사를 제법 잘 치렀다는 딸네미와 함께 오랜만에 단골 중국집 ‘야래향’에서 짬뽕과 볶음밥으로 분에 넘치는 외식을 하는 자리에서 짬뽕 국물이 목에 걸리는 경험을 한 덕에 김수영 시인을 다시 찾아 들게 된 것이다.


야래향의 백짬뽕을 좋아하는 나는 그걸 주문했고 반칠면삼(飯七麵三)의 식습관을 절대 고수하는 딸은 볶음밥을 주문했다. 그리고 TV에서는 6시 뉴스를 하고 있었다. (우리의 외식은 저녁 식사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매우 의도적으로 TV에 눈길을 주지 않고 짬뽕을 퍼 넣고 있었고 딸네미는 밥을 씹으면서 계속 TV를 보고 있었다. 아마도 삼성 비자금 얘기와 이회창씨가 또 출마 하네 마네 하는 얘기였던 듯 하다. 식당의 TV는 불행히도 내 것이 아니었고 나는 그것을 내 맘대로 끌 수가 없었다. 점점 혈압이 올랐고 거기에 눈을 박고 있는 딸네미가 점점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녀석이 애비가 하는 말에는 그저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밥을 떠서 입에 넣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내리 화면에 정신을 팔고 있었으니 딴에는 화가 날만도 했다.

“야 임마. TV좀 그만 보고 얘기 좀 하자”

“........”

“중간고사 잘 봤다며. 어떻게 봤는데?”

“잘 봤어”

“너 이 자식아 아빠가 뉴스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그렇게 까지 침을 흘려가며 봐야 돼?”

“아빠! 아빠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뉴스를 못하게 할 수는 없잖아. 난 저런 데 관심이 있어. 아빠는 어떨지 몰라도.... 그리고 아빠도 그냥 뉴스 보면서 막 화냈으면 좋겠어. 괜히 운전하면서 욕하고 싸우고 그러지 말고....”

‘허거거걱....’


‘나쁜 놈... 아빠의 아픈 곳을 그렇게 후벼 파다니.... 세상을 향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이가 된 건 아닌가 하는 무력감 때문에, 별 건 아니지만 뭔가 바꿔 보겠다고 젊음을 태웠던 것들이 도로(徒勞)가 아니었을까 하는 매우 절망적인 회한 때문에 내가 뉴스를 보지 않게 되었다고 꼭 내 입으로 얘기해야 하냐 이놈아?’

하지만 녀석의 말은 정확했다.

나는 얌체처럼 새치기하는 운전자를 그의 집까지 쫓아간 경험이 있으며, 급하게 앞장서려고 라이트를 번쩍거리는 덤프트럭을 세워서 주먹다짐 바로 전까지 간 적도 있다. 그것도 외곽순환도로 위에서... 딸네미가 보는 앞에서도 자주 그랬다. 전술했듯이 정치 얘기를 한다고 술자리를 파장으로 몰고 간 적도 여러 번이다. (아 그 동창들과 성당 형제님들이 뭘 잘못했단 말인가?)

그야말로 짬뽕 국물이 목에 턱 걸리는 순간이었다.


어찌 내가 김수영 시인의 발끝이라도 따라갈 수 있겠는가. 허지만 오늘은 그 분의 선구자적 격언들을 읽고 또 읽으려 한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 어느 날 고궁을 나서면서 부분

/변영국 200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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