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조화로운 삶ㅣ헬렌 니어링, 스코트 니어링ㅣ보리(2000년 4월)

왜 인간은 달고 기름진 것을 좋아할까?

▲헬렌니어링, 스코트 니어링, <조화로운 삶>
“좋은 약은 입에는 쓰나 병에 이롭고, 바르게 타이르는 말은 귀에는 거슬리나 행실에는 이롭다.(良藥苦於口 忠言逆於耳)”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단 것을 좋아하고 쓴 것을 싫어합니다. 어렸을 때를 떠올려 보세요. 쓴 약을 단맛이 나는 시럽에 타서 먹지는 않았던가요. 쓴 맛이 나는 커피는 대게 설탕을 타서 마시는 것을 보게 되죠.

자 왜 이렇게 사람들은 단 것을 좋아하고 쓴 것을 싫어하게 되었을까요? 왜 인간이 단 것에 긍정적으로 반응하게 되었느냐는 말이죠? 생물학자들은 인간이 단 것을 좋아하고 기름진 것을 좋아하도록 설계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먹은 음식을 위와 장에서 소화하여 흡수합니다. 그 중에 포도당은 열이나 에너지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하지요. 특히 우리의 뇌는 포도당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합니다. 몸 전체에서 쓰는 포도당의 1/4을 뇌가 혼자 사용한다고 합니다. 포도당은 생명의 중추인 뇌의 에너지원입니다. 따라서 우리 몸에서 꼭 필요한 포도당을 좋아하는 성질을 가지고 태어나도록 인간은 진화되었던 것이지요. 아직 맛을 모르는 갓난아기도 단맛이 나는 분유를 모유보다 잘 먹는다고 합니다.

단맛을 구성하는 포도당은 우리 몸에 들어와 쓰이고 나서 그냥 버려지지 않습니다. 쓰이고 난 포도당은 모아져 지방으로 바뀌어 몸에 저장이 되지요. 환경이 바뀌어 음식물을 구할 수 없을 때 지방을 분해해서 임시에너지로 사용할 수 있으니 지방은 참으로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겠죠. 그러니 지금으로부터 수 십 만 년 전 달고 기름진 것을 좋아하는 유전자를 가진 원시인은 그것을 가지지 못한 원시인보다 훨씬 더 생존에 유리했겠지요. 자연은 바로 이런 존재를 선택했을 것이구요.

유전자가 지방을 에너지 저장원으로 택한 이유도, 지방은 1g당 9kcal 의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어서 1g당 4kcal 밖에 내지 못하는 탄수화물이나 단백질에 비해 에너지 효율이 훨씬 높기 때문이기도 하죠. 한정된 육체 속에 더 많은 에너지를 저장하려면 당연히 에너지효율이 높은 방식을 선택해야 했고, 생존을 위해 이 지방을 몸 속 저장하는 것이 진화적으로 유리한 전략이었을 테지요.

이렇게 달고 기름진 것을 좋아하도록 설계된 인간은 먹을거리가 부족했던 원시시대에는 살아남기 유리했겠지만 먹을거리가 풍족해진 오늘날에는 뚱보의 운명을 껴안을 수밖에 없을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일반적으로 쓴 것을 피하는 것은 왜일까요.

식물들은 초식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전략으로 화학물질을 분비합니다. 식물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분비하는 화학물질, 즉 일종의 ‘독소’의 맛이 어떤 맛일까요. 바로 쓴맛입니다. 초식동물들이 식물을 뜯어먹으려고 할 때 식물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동물들에게 ‘쓴맛’을 보여주면 동물들은 더 이상 먹지를 않겠죠. 식물의 쓴맛은 그 식물이 독성을 가지고 있다는 신호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구역질이 썩은 고기로부터 우리의 몸을 보호하듯 쓴맛을 거부하는 미각시스템은 식물의 독성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보다 미각이 발달해 있고 특히 쓴맛에 민감하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성은 배 속에 있는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쓴맛에 민감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여성들은 임신할 수 있는 시기, 즉 사춘기에 접어들면 쓴맛을 더 잘 느끼게 되고 특히 임신 중에 민감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결국 쓴맛을 거부하는 것은 독성을 피하려는 진화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담백하지 않은 맛이 왜 건강을 망칠까?

▲홍자성, <채근담>
홍자성의 책, <채근담>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진한 술, 기름진 고기 맵고 단 것은 참맛이 아니요, 참맛은 오직 담백하다. (농비신감 비진미, 진미 지시담 膿肥辛甘 非眞味, 眞味 只是淡)”라는 구절이 그것이죠. 왜 담백한 맛이 참맛이냐고 묻는다면 답이 궁합니다. 담백한 맛이 진화적으로 인간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특별히 담백한 맛을 참맛이라고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담백하지 않은 맛, 가령 기름진 맛, 단맛, 짠맛은 확실히 몸에 나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달고 짜고, 기름진 음식이 심장병을 유발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에는 달고 기름진 것들이 넘쳐납니다.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들이 왜 이렇게 넘쳐날까요?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의 책 <조화로운 삶>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을거리의 어떤 부분을 없애고, 어떤 부분은 남길지 결정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은 이윤을 남길 가능성이다. 이윤을 얻으려면 사람들의 눈에 띄어야 하고 사람들의 입맛을 당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먹을거리를 많이 팔 수 없다. 또한 팔려는 제품은 좋은 품질을 간직한 채로 시장에 나가야 되고, 시장에서 손님이 고를 때까지 가장 보기 좋은 모양으로 무한정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요리된 음식이 소비자들의 밥상에 오르기까지는 단순히 몇 시간이나 며칠이 아니라, 몇 주, 몇 달이 걸려야 한다. 농산물이 이리저리 돌다가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 가는 동안, 이 농산물을 보존하려면 엄청나게 높거나 낮은 온도가 필요하다. 특히 썩거나 상하기 쉬운, 그래서 상품성을 떨어뜨릴 수 있는 성분은 마땅히 제거된다. 비록 그 성분이 건강에 중요하더라도 말이다. 식료품을 만드는 기준은 시장에서 갖는 상품성이지, 소비자의 건강이 아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식료품업자들의 관심은 소비자의 건강이 아니라 이익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누가 먹느냐는 신경 쓰지 않고 그것을 통해서 얼마를 벌 수 있느냐에만 관심을 쏟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보는 하얗게 정제된 밀가루를 생각해보세요. 단백질, 무기질과 같은 영양분은 낟알의 씨눈과 껍질에 있지만 밀가루를 만드는 제분업자들은 이런 상식을 무시하죠. 조금만 씹어도 삼킬 수 있는 더 가벼운 빵과 과자를 만들게 하기 위해 제분업자들은 곡식의 낟알에서 씨눈과 껍질을 없애고, 밀가루가 희게 보일 수 있도록 몸에 좋지 않은 표백제를 사용해 밀가루를 희게 만듭니다. 그런 밀가루는 보기는 좋아서 상품가치는 높아질지 모르지만 결코 몸에 좋은 밀가루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바로 이것이 오늘날 식품산업의 냉정한 현실입니다. 사람의 몸에 좋든 말든 일단 이익부터 생각하자는 이기심이 얼마 전 ‘멜라민 사태’를 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어떻든 원시시대에는 몰라도 음식물이 풍부해진 오늘날 담백하지 않은 맛, 즉 달고 기름진 맛은 인간의 건강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모넬 케미살 센스 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유아기에 쓴맛, 신맛에 길든 아이들은 몇 년이 지난 뒤에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 쓴맛과 신맛을 훨씬 즐기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의 식습관이 나이를 먹어서도 고착된다는 것이죠. 예전과는 달리 오늘날에는 아이들이 엄청난 과자를 소비합니다. 멜라민 사태로 인해서 과자 소비량이 주춤하고 있지만 대형마트에 가보면 엄청난 량의 과자가 쌓여있습니다. 바로 그 과자들을 만든 제과업자들이 진정으로 아이들의 건강을 고려하고 있을까요?

스코트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의 책은 말합니다. “많은 밀가루와 빵에는 인, 불소, 규소, 백반, 니코틴산. 브롬산 칼슘과 그밖에도 스무 가지가 넘는 다른 독성 약품이 들어 있다. 빵집에서 만드는 빵도 다른 많은 가공 식품들과 똑같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돈뿐 아니라 건강까지 희생시켜 가면서, 화학약품과 그 대체물질을 만들어서 먹고사는 사람들에게 많은 이익을 준다.” 책의 저자들이 살았던 시대에 비해 오늘날의 시대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식욕은 개체보존의 에너지고 성욕은 종족보존의 에너지입니다. 욕망은 탐욕일 때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탐욕은 남을 해치는 욕망입이지만 진정한 욕망은 개인과 인류 발전의 에너지입니다. 먹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개인의 생명을 부지시켜줍니다. 그 욕망이 인류를 이어가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자본에 대한 욕망, 이익에 대한 욕망은 개체보존에도, 종족보존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직 자본의 확대재생산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의 사람됨을 말해주는 음식문화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 <미식예찬>
<미식 예찬>을 쓴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은 말합니다. “피로를 동반하지 않는 유일한 쾌락은 먹는 즐거움”이며, “새로운 요리의 발견은 새로운 천체의 발견보다 인류의 행복에 더 큰 기여를 한다.”라고. 먹는 즐거움은 무엇에 비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그런데 먹는 행위는 단지 배고픔만을 채우는 행위, 영양만을 섭취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인간은 먹되 인간답게 먹습니다. 허겁지겁 빈 배를 채우기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창자만 채우면 된다고 하면 햄스터처럼 인간은 동족을 잡아먹을 수도 있겠죠. 끔찍한 일입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먹어야 할 것과 먹지 않을 것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잡식동물입니다. 인간만큼 이거저거 가리지 않고 먹어대는 존재가 또 있을까요. 먹을 것에 대한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을 통제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다양한 금기, 관습, 의식, 식탁 예절과 요리문화입니다. 인간의 식욕을 통제하는 가치 있는 문화가 없다면 인간은 가장 불결하고 사악한 동물이 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제사음식은 제사를 끝내기 전에 건드리면 안 된다. 어른이 먼저 드시고 나서 먹어라, 국물을 소리 내어 먹지 마라,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지 마라, 먹을 만큼만 먹고 음식 쓰레기를 남기지 마라, 밥상머리에서 싸우지 마라 등과 같은 것이 바로 인간의 식욕을 통제하는 문화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오늘날의 음식문화를 찬찬히 살펴보세요. 과연 거기에 인간다운 품위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국립국어원이 제공하는 표준국어대사전은 ‘음식’을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만든, 밥이나 국 따위의 물건’이라고 정의합니다. 멜라민 과자, 기생충 김치 같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제품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국내에서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모든 음식은 과연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아이를 굶겨라>라는 책에는 아이들의 건강을 해치는 음식 39가지가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 책의 내용이 과장이든 아니든 오늘날 상업적으로 거래되는 음식물들은 분명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농약이든 채소와 과일, 색소와 향료 등 인공적인 화학물로 범벅이 된 과자, 성장호르몬으로 키운 가축, 동물성 사료를 먹여 키운 소 등 음식의 문제점들은 이루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밤에 벌레가 있는 복숭아를 먹어도 맛있게 먹는 법입니다. 그러나 낮에는 다릅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도 마찬가지겠죠. 음식의 실상을 알고도 과연 식탁에서 먹는 즐거움이 유지할 수 있을까요. “친구들을 초대하고서 식사준비에 아무런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친구를 사귈 자격이 없다.”라고 <미식 예찬>의 저자,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은 말합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장사치라고는 할 수 있어도 우리의 친구일 수는 없겠지요. 우리를 친구처럼 대해주는 사람의 음식을 먹고 싶은 것, 이것은 비단 저 하나만의 소원은 아닐 것입니다.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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