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국의 세상만사 인생사] 슬픈 윤금이

6년 전인가 대학로에서 만들어 올렸던 공연 중 ‘금이야 사랑해’라는 공연이 있었다. 1992년 미군 병사 케네스 마클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한 윤금이씨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올렸던 것인데 시종이 여일하게 참혹하고 어두운 공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관객들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공연을 만들면서 나는 눈물을 아주 많이 흘렸다. 대본을 쓰면서 내 대본에 겨워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가당한 일이겠는가만 아무튼 나는 무지 울었다. 세상에... 그렇게 억울한 삶이 있다니...


윤금이는 꽃을 팔았다. 물론 밤이면 미군 병사들을 자기 집으로 불러 몸도 팔았다. 말하자면 동두천 여자들 중에서도 아주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고 그 돈은 전라도 어디에 사는 어머니와 오빠에게 고스란히 송금됐다. 동두천 보산동에서 만난 어느 활동가 선배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때에는 아가씨들이 돈을 못 받으면 먹을 게 없었어. 때때로 돼지 여물통에 있는 햄 쪼가리를 주워 먹기도 했지.”

그런데 미군 병사들은 돈을 잘 주지 않았단다. 그래서 여자들이 악다구니를 쓰면서 돈을 달라 소리치고, 미군들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그 여자들을 때리고 밀치는 광경이 저녁나절이면 여기저기 펼쳐졌단다.

미군들은 동두천의 여자들을 ‘Yellow Fucking-machine’이라고 불렀단다.

윤금이가 그 구석에 팽개쳐진 유일한 이유는 ‘못 배우고 가난한’ 탓이었다.


의정부인가 동두천인가 어디에 일명 ‘턱걸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고 한다. 나는 가보지 못했지만 그저 동네 한 귀퉁이의 음침한 곳이라고 한다. 선배님에게 그 곳이 왜 ‘턱걸이’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모른다면서 단지 그 곳에서 무수히 많은 창녀들이 죽어나간다고 한다. 내가 그 곳에 갔던 때가 2001년이었는데 그 때까지도 그저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죽어 나간다고 한다. (경찰이 수사를 하지 않으니 이유가 밝혀질 일도 없다.) 아무도 수습하지 않는 시신을 자신이 직접 수습한 적이 꽤 있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조금 진저리를 치셨다. 그 동두천 들머리에는 대충 ‘관광 특구’인가 뭔가 하는 내용의 입간판이 서 있었다.


의정부 교도소를 지나면 뺏벌이라는 동네가 있고 거기에 캠프케이시였는지 캠프스탠리였는지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아무튼 미군 기지가 있다. 나는 거기서 60 전후는 되어 보이는 많은 ‘언니’들을 목격했다. (기지촌 활동가들은 나이든 창녀를 ‘언니’라고 부른다) 언니들은 주름을 가리기 위해서 그랬는지 거의 ‘무서울’ 정도의 짙은 화장을 하고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셨다. “요즘은 러시아 계집애들 때문에 벌이가 시원치 않아.”

요리를 가르쳐 기지촌이 아닌 곳에 취업을 보내면 언니들은 두 달도 안 돼서 다시 온다고 한다. 그 이유는 슬프게도 ‘남자가 좋아서’란다. 남자를, 그것도 서양의 검고 흰 남자를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달리 해 본 것이 없는 초로의 언니들은 그저 자신이 천성적으로 남자를 좋아하는가보다고 희죽 웃고들 있었다. 정말 슬펐다. 아 이놈의 잔인무도한 사회여...


기지촌에도 식당이 있고 세탁소가 있고 미용실도 있으며 가전제품을 파는 곳도 있었다. 애완견 센타도 있고 산부인과도 있고 치과도 있었다. 그리고 그 주 고객은 바로 언니들을 비롯한 ‘아가씨’들이었다. 적어도 2001년도에는 그랬다. 말하자면 죽어라 몸을 팔고, 화대를 받기 위해 악다구니를 쓰고 때로는 목숨까지 잃어가며 번 돈으로 기지촌이 살고 있었다.

그다지 선량하지 않은 미군들이, 그것도 술에 잔뜩 취한 미군들이 평화로운 우리의 대한민국 이곳저곳에서 총질을 하거나 칼부림을 하지 못하도록 온 몸을 바쳐 ‘언니들과 아가씨들’이 막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순이와 미선이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다치고 죽었지만 말이다.)

진정 그들은 온 몸을 던져 우리를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그 곳을 벗어나고 싶었으면 금이는 하나에 2달러짜리 장미를 들고 다니며 클럽의 정문에서 그리도 많은 발길질을 감수했을까. 얼마나 삶이 고단했으면 가장 친한 친구에게 “이제 아파서 더는 일을 못 하겠어”라고 얘기했을까. 얼마나 커다란 한을 품고 그리도 처참하게 죽었을까...


연기하는 후배들과 술을 먹다가 그 공연 얘기가 나왔다. 바로 옆 자리에서 어떤 30대 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반색을 하며 “어머 그 공연 연출하신 분이세요? 저 그 공연 때문에 연극 팬이 됐어요.”

너무 고맙다. 고마운 만큼 슬프다. 금이를 죽이고 천안 교도소에서 스테이크가 맛이 없다는 둥 처우가 형편없다는 둥 물의를 빚다가 지난 8월 케네스 마클이 미국으로 갔는데 그 놈 면상 한번 후려갈기기는커녕 이것저것 찾아내서 스스로를 합리화 하며 현실에 굴신하는 내가 슬프다.

그 무엇보다도......

순교가 뭔지도 모르고 순교한 윤금이가 슬프다.

/변영국 2007-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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