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영성 따라 배우기-3 : 교부들의 가르침]

사회주의자들이 그분의 친구이고 그분의 동지였다

▲ 젊은 날 도로시 데이
도로시 데이가 그리스도교 신앙과 관련해서 줄곧 던진 질문은 정치적 비전과 복음적 비전을 통합시켜서 교회의 비전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는 처음 가톨릭교회에 입문할 때에도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그리스도가 선포한 복음 안에서 발견하려고 애썼다.

그 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선 사업에만 치중하는 교회를 두고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또 다른 질문이 내 마음 속에 있었다. ‘왜 악을 처음부터 피하지 않고, 그것을 치료하는 일에만 매달려 있는가?’ 사회질서의 변화를 위해 일하는 성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노예들을 보살피기만 하지 말고, 노예제도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성인들은?”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 신자가 된 뒤에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해 일할 수 없음에 괴로워하였다. 가톨릭 교인들과는 우정을 나누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비전을 여전히 사회주의자 동료들의 모습 속에서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도로시는 자신이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사회주의자) 형제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혼자 조용히 책을 읽고 기도를 하며 나 자신에게 몰두하며 지낸 여름날이 죄스럽게 느껴졌다. 우리의 주님께서 얼마나 저들을 사랑하시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정의를 위하여 일하려는 저들의 마음이 얼마나 그분의 마음에 가까우며 저들이야말로 그분의 친구이고 그분의 동지였다. 나는 우리 주님께서 환금상들의 탁자를 성전 안에서 뒤엎으셨던 일을 생각했다. [...] 이름도 없는 유태인이 성전으로 가서 세상의 모든 부를 비웃으며 동전과 상인들의 금을 내던져 버리신 용기를 생각했다.”

도로시 데이가 회심하였을 당시는 미국의 경제 대공황기였다. 거리에는 가난이 만연하였으며, 실업자들이 즐비하였다. 그러나 한편에는 여전히 부유한 미국인들과 부유한 교회가 있었다. 그는 교종의 회칙들이나 사회적 가르침에 관련된 책을 읽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사제와 수녀들, 심지어 추기경조차 잊어버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응답은 교회를 등지는 것이 아니었고 자신과 친구들뿐 아니라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 즈음(1929년)에 교종 비오 11세는 벨지움에서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만들어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있었던 조셉 카르딘 추기경에게 슬프게 말했다고 한다. “세계의 노동자들이 교회로부터 망각되어 가고 있습니다.” 도로시는 그 말을 평생 가슴속에 새겨두었다.

새로운 가톨릭운동의 영감을 준 피터 모린

▲도로시에게 영적 사회적 비전을 제시했던 피터 모린
도로시 데이에게 새로운 영감을 준 사람은 피터 모린이었다. 도로시 데이는 피터 모린을 만나기 직전에 워싱턴의 가톨릭대학 안에 있던 성모 무염시태 대성당에서 자신의 능력을 동료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쓸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고 소망했으며, 그 응답처럼 피터 모린이 그를 찾아와 이미 교부들이 제시했던 그리스도교적 이상이 담긴 새로운 가톨릭운동에 대한 청사진을 제공해 주었다.

실제로 교부들이 가난과 정의에 관하여 보여준 집념은 철저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신앙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덕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미천한 사람들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정의롭고 사랑에 찬 업적들을 통하여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특별한 관심과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며, 이들을 위해 교회의 보석들과 보화마저 팔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보물들이 유익한 그리스도의 황금으로 변하기 때문이라고 암브로시오 성인은 말한다.

또한 모든 부(富)는 가난한 이들의 고통과 수난을 요구하는데,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부자와 가난한 이들이 갈라져 나온 것은 결국 약탈과 부 축적을 통해서 이뤄진 것이라고 보았다. 이들 교부들은 창조된 재화를 모든 이들이 공평하게 차지하고 이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사유재산권에 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재화가 만민을 위한 보편적 목적을 존중하지 않고 또 타인들과 연대적 차원에서 분배되지 않는 사유재산권을 이기주의, 분열과 착취의 원인으로 보았기 때문에 정의가 요청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선을 행하는 것은 본래 그들의 몫인 것을 되돌려주는 것이므로 정의감에서 나온 것으로 여겼다.

교부들의 모범, 가난한 교회를 위해

또한 교부들은 이러한 생각을 교회 안에 천명할 뿐 아니라 몸소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성인(339~397년)은 팔 없는 긴 옷과 수수한 외투를 걸치고 다녔으며, 대 바실리오 성인과 마찬가지로 주교로 서임되자 곧 자신의 재산을 교회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증하고 주일과 대축일을 제외하고는 하루에 한 끼만 식사하여 “가벼운 행장을 한 가난한 군인처럼 주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죄수, 환자들이 올바른 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을 사면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한편 정치, 권력, 부에 관심이 없이 오로지 그리스도에 관한 일에만 열심이었던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350~407년)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에 오르자 교구를 복음의 원칙에 따라서 개혁하려고 하였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성인처럼 화려한 주교의 삶을 소박한 생활방식으로 바꾸었으며, 자신의 소유물과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여행자들을 위하여 필요한 만큼 내다 팔았다. 또한 올림피아스와 같은 상류계급 귀부인들의 도움을 얻어 여자 봉사자들과 과부들이 행하는 사회사업을 재조직하였고, 세속의 성직자들에게 모범적으로 생활하도록 권고하고, 강론 중에 황실에 사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공개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생활원칙을 선포하였다.

그리스도인다운 삶과 새로운 세계의 창조

이러한 교부들의 사상과 삶은 피터 모린과 도로시 데이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피터 모린은 55세의 농부 출신으로서 지난 20년 동안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복음을 행동으로 옮길 고유한 비전을 구상해 왔으며, 도로시 데이가 그 비전을 현실로 만들 적임자라고 여겼다. 그들은 복음서의 철저한 사회적 메시지를 수행하는 운동을 구상했다. 단순히 불의를 고발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질서, 노동의 철학과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것에 기초한 새 질서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피터 모린은 말했다. 피터 모린은 교부들의 사상에 기초한 비전을 도로시 데이에게 제시한 탁월한 교사였다. 피터 모린은 <쉬운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말한다,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 아니라 민중의 희망이다.
현대사회는 물질주의 사회가 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변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지속적인 행동을 통해서
물질주의가 낳은 침체된 분위기에
지속적인 활력을 불어넣는다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종교가 민중의 아편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레이몽 드 베케르가 말하듯이,
‘평신도의 사회적 과업은 세상에서의 삶을 성화시키는 것,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리스도인다운 세상 삶의 창조이다.”

피터 모린과 도로시 데이는 교부들의 전통에 따라 노동과 기도와 자선을 행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정부와 교회가 그러한 프로그램을 시행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사명을 깨달은 사람들이 먼저 '지금 여기'에서 자신들의 비전에 따라 사는 것이다. 이들은 “사람들이 더 선해지기 쉬운” 사회를 창조해 나가길 갈망했다. 1933년 5월 1일 성요셉 축일에 ‘가톨릭일꾼’ 신문이 유니온 광장에서 배포된 후, 이 신문은 미국 전역에 ‘환대의 집’을 기반으로 하는 가톨릭일꾼운동의 도구가 되었다. 가톨릭일꾼 공동체는 전통적인 애덕활동뿐 아니라 사회정의와 평화운동에 결합되어 있다. 도로시 데이는 피터 모린과 만난 뒤 50년 동안 몸담게 된 이 운동에서 자신의 성소를 발견하였다.

하느님의 창조적 사랑에 응답하라는 부르심

▲트라피스트회의 영성가 토머스 머튼
성소란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도록 그분으로부터 초대받는 것이다. 토마스 머튼이 말하듯이 성소란 ‘하느님의 창조적 사랑에 응답하며 진정한 자아를 찾는’ 문제이기 때문에 단순히 특정한 생활방식이나 일과 같이 기성복을 입는 것과는 다르다.

많은 성인들의 영적 투쟁은 당대에 유행하던 선택을 넘어 거룩함으로 가는 새로운 길을 여는 것이었다. 안토니오는 사막에서, 베네딕토는 수도원에서,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는 철저한 가난이라는 그들만의 길을 찾았다. 그들 모두는 다른 사람들이 따르도록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길은 기존의 방법들을 먼저 거부하는 데에서 싹텄다. 무엇인가가 그들로 하여금 다른 길을 찾도록 만든 것이다.

성경에서 부르심은 항상 하느님께서 이름을 부르시고, “여기 제가 있습니다”라고 응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는 단순히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이 말할 수 없이 중대한 순간임을 알아채는 것이다. 부르심은 한 사람의 정체성 전체와 목표를 상기시키는 초월적인 질문에 대하여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묻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달려있는 문제다.

천국으로 가는 모든 길이 천국

도로시 데이는 피터 모린의 첫 방문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으며, 그의 구상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성소를 알아차렸다. 그럼으로써, 사회질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성인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그 답변은 도로시 데이 ‘자신의 삶’을 통해 그러한 성인을 실현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소를 발견하는 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일생에 걸친 도전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래서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는 ‘부르심 안의 부르심’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끝까지 충실하기 위한 지속적인 식별이 요청되는 것이다.

한편 일단 회심이 일어나면, 수많은 무질서로부터 즐거움이 가득 찬 해결책이 그에게 주어진다. 삶이 평범한 짐으로 무거웠지만, 이제는 그것마저 타오르는 불길로 밝게 빛난다. 생기와 에너지를 갖게 되어 ‘천국으로 가는 나의 길’이 열린다. 그리고 도로시가 글을 쓸 때 즐겨 인용했던 아빌라의 데레사 성인이 말한대로 “천국으로 가는 모든 길이 천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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