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국의 세상만사 인생사]

어쩌다가 인천의 모 중학교에서 연극을 가르치게 되었다.

사실 연극을 ‘가르친다’라는 것이 맞는 표현인지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녀석들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선생님은 ‘가르치는’ 사람임에 분명할 터, 나는 연극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그러다가 얼떨결에 ‘공연’을 준비하게 되었다.

난감한 일이었다. 그저 아이들과 놀고, 즐기고 하면서 연극이라기보다는 ‘연극 놀이’를 했고 그것이 맞는 것이라 생각해 오다가, 말하자면 된서리를 맞은 꼴인데 무엇보다도 수업시간에 떠들고, 자고, 음악 듣고 하는 것이 일상이 된 녀석들을 데리고 ‘공연’을 준비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극을 한 편 올리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텍스트와 씨름해야 하고 인물 분석이니 스토리 라인 분석이니 하면서 생혈을 쥐어짜야 하는가? 블로킹 과정은 또 얼마나 지난하고 힘든가? 연극을 준비하는 배우들과 스탭들이 얼마나 집중을 해야 하는가 말이다)


그러나 그곳은 자유를 기저로 하는 ‘대학로’가 아니라 미래의 일꾼을 길러내는 ‘학교’였으며 그 곳의 결정은 추상같고 장중했다. 나는 바야흐로 약 너 댓 번의 연습을 통해 연극을 한편 올려야 하는 참으로 ‘획기적인’ 입장이 되어버렸고 이제껏 즐거움을 선사하던 내 학생들의 생기발랄함은 어느덧 살벌한 스트레스가 되어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나의 수업 시간에는 모든 것이 자유다. 그러니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 재미없으면 자도 그만이다.” 이랬던 내가 조금이라도 아이들이 떠들라치면 고함을 지르고 (한동안 목이 잠겨 있었다) 일부러 험상궂은 얼굴을 지어가며 아이들을 을러댔고 대본을 외우지 못하는 아이를 참아내지 못하는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작태였다.

도대체 내가 무슨 권리로 아이들을 야단친다는 말인가?

야단맞은 아이들의 슬픔을 상쇄할 만큼의 무엇을 그 아이들에게 줄 수 있다는 말인가? 점점 슬퍼지기 시작했다. 힘들었다.

그러다가 결국 공연 전날이 되었고 아이들은 그 때까지도 대본을 외우지 못했다. 그런데.......

하루 전이 되어 시작한 연습에서 나는 너무 놀랐다.

그리고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맛있는 카스테라를 먹으며 잠시 콧날이 시큰해졌다. 이 자리를 빌어 별 것도 아닌 나의 모든 것을 믿어주는 그녀석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염을 전한다.


연습을 할 때면 불러 모으는 데에만 30분이 넘었던 녀석들이, 내가 도착했을 때 강당에 도열해 있었던 것은 즐거운 충격의 시작이었다.

“선생님. 왜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이거는 1학년 희철이의 근엄한 일갈)

“야 이 바보야. 선생님 어제 약속한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오셨거든!”

(이거는 자진하여 스탭장을 맡은 순화의 변호)

사실 연습할 의무가 없는, 말하자면 수업이 없는 날인데 녀석들은 모두 집에 가지 않고 소위 보충 연습을 하러 모인 것이다. 그런데 정말이지 그것은 시작이었다. 하루 전 까지 대본의 반도 못 외웠던 녀석들이 세상에... 완벽하게 대본을 외웠고, 지들끼리 연습을 얼마나 했던지 구석구석에서 진짜 연극을 보는 것 같은 사실감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었다. 게다가...

외진 곳에 있는 학교라 집에 가려면 부모님이 차를 가지고 와야 하는 아이들이 많아서 이제 대충 하고 집에 가자고 하려는데 한 녀석이 벌떡 일어나더니 간절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제발 한 번만 더 하고 가요. 우리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녀석들은 모두 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감동이었다.

아... 이것이야말로 내가 연극을 하게 되고 지금까지도 그 끄나풀을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바로 ‘의리’ 이며 ‘열정’이 아니던가.

진정 내 자식 같은 녀석들.... 너무 사랑한다.


돌아오려고 차에 시동을 거는 데 중1 수경이가 달려오더니 갑자기 가방에서 뭔가를 꺼낸다.

“선생님. 우리는 떡볶이며 빵이며 먹었지만 선생님은 저녁도 못 드셨잖아요. 이거 드셔요...”

제 간식으로 곱게 싸 온 카스테라였다.

/변영국 2007-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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