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학번 선배와 술잔 기울이며 김대중 당선 소식을 듣던 97학번 새내기

대학 새내기 시절에 문학동아리를 했는데, 전통이 있었는지 70년대 학번이 많이 있었다. 97학번 새내기가 79학번 선배와 동아리방에서 소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인생에 두 번 없는 기회라서 그 때는 바싹 긴장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동아리는 전통적으로 노동운동이나 환경운동 등 진보운동에 관한 문학창작과 비평작업을 같이 했었는데, 박노해 <노동의 새벽>을 필독도서로 했을 정도였다.

선배들도 진보적이고 진보운동을 했던 추억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97년에 김대중 후보가 이회창 후보와 접전을 벌이고 있었을 때 머릿고기를 파는 술집에서 까마득한 선배들과 술을 마시면서 선거방송을 보고 있었다.

신문도 안 읽으니 시국을 알 리 없고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리가 없었다. 다만 선배들이 옆에서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간절히 바라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그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이겼다. 건국 최초의 정권교체라는 자막이 뜨면서 사람들이 환호했다. 대통령 당선확정이 아마 밤 9시~10시 사이에 결정이 되었던 것 같다.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한줄에 꽂혀 미치도록 선거운동을 한 선배

79학번 선배는 92년 대선 당시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 선배는 김대중 후보의 선거공보에 담겨 있는 단 한 줄에 감명받고 시키지도 않은 선거운동을 하면서 미치도록 뛰어다녔다고 한다. 노태우와의 대결인지 김영삼과의 대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구호는 바로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이제까지 '양심'이라는 말은 형식적으로만 사용했고 도덕교과서에서만 보았던 것이지만, 김대중 후보의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말에 이르러서야 그 선배는 '양심'이라는 말의 무서움을 깨달았다고 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이다"라는 어록도 마찬가지다.

김대중의 행동은 그 후 현대사 공부를 통해 생생히 알 수 있었다. 40대 기수론에서부터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이야기, 재야 정치인으로서 활약하던 이야기. 그리고 헌책방에서 만났던 <후광 전집> 같은 책의 볼륨을 보면 김대중 대통령이 왜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어울리는지 알 수 있다.

한창 비판하기 좋아했던 시절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부패 스캔들과 노무현 대통령의 FTA 등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반감을 곳곳에 쏟아냈다. 그 때의 반감은 나름대로 현실인식과 신념에 의한 것이지만, 전후사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쏟아낸 것들이 적지 않아 뒤늦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논어에는 "섣달 혹독한 겨울이 지난 후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늦게까지 지지 않는지 알게 된다."(歲寒然後知 松柏之後凋)라는 말이 있는데, 지금도 나는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 알 수 없다.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이명박 정권이 막바지로 갈수록 올해 함께 돌아가신 두 대통령 생각에 목을 놓아 엉엉 울 것 같다. 기형도의 시구절처럼.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바람의 집 - 겨울 版畵 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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