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습니다.

제가 적어 내려가는 이야기를 아무런 질문 없이 받아내 주는 하얀 종이와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는 제 마음을 이렇게 저렇게 표현해 주는 까만 글씨는 소심하고 낯을 많이 가리는 제게 좋은 친구였습니다.

글로써 많은 사람에게 용기와 위로를 선물하는 분들을 보며 꿈을 키운 적도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언어의 무게감을 체감하게 됩니다. 말 한마디를 소리 내어서 하는 것도 점점 두려워지고, 한 글자 써 내려가는 것도 점점 느려집니다.

유독 올 한 해는 더 그런 것 같습니다. 확실한 것이 줄어드니 희망도 줄어들고, 자극이 제한적이니 삶이 더 단순해진 탓도 있을까요?

그동안은 시끌벅적 청소년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심오한 이야기나 질문들이 실마리가 되어 글이 완성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집 안에서만 지내며, 매일 만나는 수녀님 세 분과의 생활에서 고요함과 단순함을 배우며 좋을 때도 있지만, 글쎄요. 제한 속도 없이 신나게 달리다가 갑자기 멈춰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요?

 

네. 지금 저는 올해 들어 글 쓰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이야기를 에둘러 길게 쓰고 있습니다.

어딜 가든, 무엇을 보든 제 머릿속은 언제나 ‘이번 달은 뭘 쓰나?’가 가득 차 있습니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심지어 수도자로서 난 뭘 증언하며 살아야 하는 건가. 깊고 깊은 고민이 시작됩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봅니다만, 결국 네 번째 화요일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제가 있는 곳은, 3차 유행이라는 제목을 달고 야간 통행 금지까지 결정되었습니다. 외출 여부를 떠나, 주변의 심각성에 위축됩니다. 무기력한 마음에 동네 산책도 하러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아침 기도 중 창밖을 멍하니 보니, 결석도 하지 않고 나타나 언제나처럼 밝게 빛나고 해가 미운 마음도 듭니다. 괜한 주변 탓이지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 상황에서 희망을 이야기하기도,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좀 더 조심스럽고 어렵습니다.

 

무기력함을 떨쳐내고자, 평소에 해 보지 않은 일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도로를 지나 도착한 곳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 컴컴한 기운만이 있었습니다. 처음 가 보는 곳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우리는 해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어둠에 압도되어 묻혀 버렸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 생각이 없어질 때쯤, 깜깜했던 하늘은 천천히 여러 색으로 변해 갑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던 곳에 원래 있었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해가 뜨는 속도에 맞춰 주변에 있는 사물들도 생기를 찾아갑니다. 처음엔 희미하게만 보이던 것들이 떠오르는 해의 도움을 받아 꼴을 갖추어 갑니다. 어느새, 해는 자신의 자리를 잡았고, 그 어둠이 언제 있었냐는 듯, 우리의 일상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기 1,1-3)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채 드러나지 않은 것입니다.

끝나지 않고 반복만 되는, 전 세계가 앓고 있는 이 상황에 끝이 없는 것은 아닐 겁니다.

말할 때마다 무기력해지는 ‘희망’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에게 기다림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

곧 시작되는 대림 기간의 기다림을 좀 더 깊이 체험하는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로마 8,24-25)

 

이지현

성심수녀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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