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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선배들은 그때 무엇을 했나"라는 물음, 늘 생각했다퇴임 앞둔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 인터뷰

“그동안 힘들어 하는 이들의 어려움을 듣고, 조금 더 가까이 하며 고민을 나누고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중 보람과 기쁨이었다고 여깁니다.”

2002년부터 18년간 제주교구장의 자리를 지켜온 강우일 주교. 오는 11월 17일 이임 미사를 끝으로 공식 직함을 내려놓게 되는 그에게 가장 기뻤던 것이 무엇인지 묻자 이렇게 답했다.

1974년 사제품을 받고, 1986년부터 16년간의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시절, 2002년부터 제주교구장으로서 보낸 시간을 지나, 은퇴 주교로 일상의 사목을 이어갈 강우일 주교를 만나 소회를 들은 자리다.

“1986년 주교품을 받고 16년을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일했고, 그 이전에도 중림동, 명동, 난곡동 본당에서 보낸 2년 6개월을 제외하고는 줄곧 명동 교구청에서 살았어요. 최루탄 가스, 대한민국의 온갖 문제와 갈등, 소용돌이의 한복판에서 오래 지냈죠. 그러다가 제주에 왔는데 너무 평화스럽고, 자연도 아름다웠어요. 내심 하느님이 그동안 고생했으니 좋은 곳에서 좀 쉬라고 포상휴가처럼 주신 거라고 생각했죠.(웃음)”

강우일 주교가 처음 만난 제주는 평화롭고 독보적으로 아름다운 자연을 지닌 곳이었다. 즐거워한 것도 잠시, 그는 오래지 않아 제주가 품고 있던 깊은 상처를 보게 됐다.

“제주도 땅과 백성의 역사를 알고 나니, 즐거워하며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 전에는 사제로 살거나 보좌주교로 살았기 때문에 주로 윗분들의 뜻에 순명하고 공동체 뜻과 공동선을 따라가는 수동적인 삶을 살았다면, 제주에서는 가야 할 길을 선택해야 하고, 관철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우선 선택해야 하느냐는 과제가 생겼습니다.”

교구장직에 더해 얹힌 제주 땅과 사람들의 무게. 강 주교는 “누군가 시켜주지 않으니 가만히 있으면 물 흐르듯이 흘러갈 수 있었겠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며, “보다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길을 찾는 삶의 자세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했다.

1980-90년대의 서울 명동, 그리고 제주. 최루탄 가스 자욱하고, 피 흘리는 상처의 현장을 떠나니 이번에는 속으로 깊이 곪은 종기를 마주하는 자리로. 현대사를 역순으로 겪은 셈이라고 하자, 강 주교는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임 미사를 앞둔 날, 제주교구청에서 강우일 주교를 만났다. ⓒ정현진 기자

제주라는 지역의 역사적, 지리적 특수성. 강우일 주교는 4.3사건, 강정해군기지, 제2공항, 제주 난민 등을 통해 제주가 가진 아픔을 줄곧 이야기해 왔다. 교회 안에 머물지 않고 지역의 상황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며, 또 어떤 의미를 지닐까.

강 주교는 “늘 현대를 사는 우리 교회가 가장 먼저 목표하고 지향해야 할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과 4개 헌장으로 제시한 길이며, 그 전체 맥락이 이 시대 교회의 좌표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강 주교는 2년 6개월의 짧은 본당 사목 생활 가운데 특히 서울 난곡동 본당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난곡동 본당은 서울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이 모이는 산동네였다. 그곳에서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지역민들과 같이 호흡하고 살면서 함께 느끼고 묵상하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정한 사목의 기본 노선은 내가 사는 지역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감안해서 그 지역의 사고를 통해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원칙은 제주에서도 적용됐다.

“제주 4.3을 성찰하며, 이 사건을 단순히 한국 현대사의 한 귀퉁이에서 일어난 일시적 비극으로 보고, 그에 대한 시시비비를 논하고 사회적 책임을 규명하는 데 그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제는 4.3 안에서 오랜 민족의 삶의 궤적 속에 숨겨진 더 깊은 내면적 가치와의 연결고리를 발견해야 한다.” (2018년 2월 제주 4.3 7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발언 중)

강 주교는 “처음에는 제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관망하는 시간이 필요했다”면서, “제주는 육지에서 볼 때 먼 외딴 섬이지만 살면서 제주도 역사와 도민들이 살아온 경험을 되짚어 보니, 먼 외딴 섬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현대사의 맥을 제대로 알아야 미래로 갈 수 있고, 그런 측면에서 제주도민들이 살아온 삶이 현대사의 중요한 단락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많이 느끼게 됐다"며, "제주는 한반도 전체 분단의 역사와 뗄 수 없는 곳이고, 분단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아프게 경험한 곳이다. 그것을 국민 전체가 공유해야 우리가 앓고 있는 분단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미래를 살 수 있다"고 말했다.

2013년, 강정 평화대행진에 참여한 강우일 주교. 쌍용차 해고자들과 함께. (지금여기 자료사진)

 

강정해군기지, 4대강, 탈핵, 세월호, 제주 제2공항.... 강우일 주교와 연관되는 키워드들이다.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주교회의 의장으로 있었던 6년 역시 한국 사회는 많은 소용돌이를 겪었고, 강우일 주교는 이 한복판에 있었다.

“우여곡절이 참으로 많으셨다”는 말에 강 주교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거나 적극적인 행동파도 아니었다. 그런 나를 하느님이 가만 두지 않고 자꾸 흔들어 깨우셨다. 정신 차리라며 자극을 주신다는 생각이 든다”고 답했다.

여러 사회적 이슈에 대해 발언한 탓에 강 주교는 ‘진보’라는 인식이 생겼고, 그에 따른 기대치도 상당했다. 이런 평가와 인식에 대해 그는 “여러 사회적 문제에 대해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답을 내야 했다.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보수나 진보라는 기준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가르침을 어떻게 하면 가장 올바르게 증언하고 증거할 수 있는지가 기준이었다”고 말했다.

“의장으로서 말을 하고 행동해야 했기 때문에 조심스러웠고, 누군가에게 누를 끼치는 것도 염려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교회 전체를 생각할 때, 나중에 교회가 그 현장에서 가만히 있었다는 평가를 받아서는 안 되고, 강도 당한 이를 외면한 레위인과 사제의 선택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런 맥락에서 이뤄진 선택과 행동, 말들에 대해 그는 “또 하나 늘 염두에 뒀던 것은 우리 뒷 세대의 물음이었다”고 답했다.

강 주교는 “선택을 했지만, 늘 올바로 응답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나름대로 어느 방향으로 갈지 또는 가만히 있어야 할지 결정하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으면 편할 테지만 후배들이 선배들은 무엇을 했는지 안타깝게 묻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복음을 증거하는 일, 강도당한 이를 외면하지 않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따르기 위한 선택들. 그 가운데서 가장 극적인 어떤 장면이 있다면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중 봉헌된 광화문 시복시성 미사 전의 선택일 것이다.

“눈물 흘린 사람을 내쫓고 미사를 할 수 없으며, 그들의 아픔을 끌어안고 가겠다” (2014년 8월, 시복시성미사 전 대국민담화)

당시는 미사가 진행될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가족이 단식농성을 하고 있을 때였다. 교황을 만나 자신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었던 가족들은 광화문광장에 남아 있기로 결정했다. 의견은 분분했고, 교황방한준비위원장이었던 강 주교는 결정해야 했다.

강 주교는 당시 상황에 대해, “어떤 찬반 입장도 낼 수 없었다. 고민을 많이 했지만 남아 있기로 한 이들을 나가도록 하려면 물리적 힘을 써야 하고, 그건 안 될 일이었다”며, “결국 그들과 함께 미사를 하기로 결정했고, 이를 기자회견과 대국민담화를 통해 밝혔다”고 말했다.

2014년 7월 25일, 광화문 세월호 가족 단식농성장을 방문한 강우일 주교. 그는 교황 방한을 앞두고, "눈물 흘리는 이들을 내쫒고 전례를 행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금여기 자료사진)

예민하게 식별하고 주변을 살피면서도 원칙을 지켜야 하는 매 순간의 선택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강 주교는 “강정해군기지 문제를 제기할 때”였다고 답했다.

“강정이야기를 교회 안에서 할 때였습니다. 교회 안팎에서 모두 힘들었어요. 교구 사제들도 선뜻 이해하지 못했고, 도민들의 입장도 나뉘었습니다. 한 마디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제주의 깊은 상처와 악몽 때문에 도민들이나 시민사회조차 이 문제에 대해 목소리 내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에요. 나라도 나서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다 끝나겠구나, 죽더라도 소리라도 내고 죽자는 심정으로, 교회라도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강 주교는 다행히 다른 주교들이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고 지지한 덕분에 천주교연대를 비롯한 여러 활동을 할 수 있다면서, “세월이 흐르면서 주교들의 태도도 전향적이 됐고, 호응해 줬다. 나 혼자서 한 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 강 주교가 망설이지 않은 일이 있다. 제주 제2공항 문제다. 강 주교는 지난 시간 제주가 어떻게 망가지는지 모든 것을 봐 왔고, 이윤 때문에 제주를 그야말로 “절단 낸다”는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라고 말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 복음을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자 한다면, 오늘의 세상을 주도하고 이끌어가는 메커니즘의 어디가 잘못됐는지를 끊임없이 주시하면서 그것을 지적하고 항의하고 호소하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2014년 11월 한 강연에서 강우일 주교가 한 말이다. 강 주교는 퇴임 뒤, 계속 제주도민으로 살아갈 계획이다. 누구든 자신을 찾아도 된다는 당부도 함께였다. 그가 현직 주교로 말하고 찾아갔던 일들은 계속 제주에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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