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우 신부] 11월 12일(연중 제33주일) 잠언 31,10-13.19-20.30-31; 1테살 5,1-6; 마태 25,14-30

무언가 책임을 맡는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끊임없이 내가 맡은 부분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일을 할 때 앞장서서 사람들을 이끌고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분도 계시고, 뒤에서 받침해 주는 역할을 선호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분명한 것은 책임을 맡는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그 책임을 맡는다면 그 부담은 조금 감소하겠지만 나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 주어질 때 우리는 더 큰 압박감을 느끼곤 합니다.

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본당 보좌신부 시절 나는 이때쯤 뭐하고 있었을까 생각해 보니 사람 붙잡는 데 꽤나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본당에서 이곳저곳에서 봉사를 하시다가 그만두겠다는 분을 말려야 하고 또 새로운 분들을 찾는 데 많은 애를 썼던 것 같습니다. 몇 년 정도 하셨으면 이제 놓아 드리는게(?) 맞는 줄 알면서도 아쉽기 마련입니다. 보좌신부님들은 또 당면하는 과제들이 있습니다. 학업에 더 충실하기 위해 주일학교 교사를 그만두어야겠다는 주일학교 선생님들, 직장 문제 때문에 청년회 간부를 못하겠다는 청년들. 일선 본당에 계시는 신부님들께서 요즘 시기에 많이 겪으시는 일들이시리라 생각합니다. 작년에 했던 ‘내년만!’이라는 말이 올해도 ‘내년만!’이 되어 가는 장면들, 많은 분께서 공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이런 분들도 계십니다. “신부님, 이것은 제 능력 밖의 일인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을 맡는 것은 교만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은 가득하지만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그것이 겸손의 모습이라 생각하시며 살아가시는 분들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러한 분들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인 듯합니다. 복음의 이야기는 많은 교우 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주인이 여행을 가면서 종들에게 재산을 맡기고, 돌아와서 그것을 확인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그 복음 단락을 읽으면 ‘주님의 주신 탈렌트를 썩히지 말고 열심히 써야지’라는 교과서적인 교훈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제가 우선적으로 주목하고 싶은 말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마태 25,15)라는 말입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주인은 모든 종에게 똑같은 탈렌트를 맡기지 않습니다. 분명 종들의 능력을 시험할 목적이라면 똑같은 조건을 부여하고 그 결과에 따라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종들의 능력에 따라 재산을 다르게 맡깁니다. 이 비유와 같이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일을 맡기지 않으십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라는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에 벗어나는 일을 맡기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것은 복음 뒷부분에도 명확히 드러납니다. 주인의 모습처럼 모든 사람에게 같은 결과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에게 주님께서는 그 이상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습니다. 한 탈렌트를 받은이가 벌을 받은 것은 두 탈렌트나 세 탈렌트를 벌어들이지 못한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을 보고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 일에 충실하였느냐를 보고 계십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칭찬한 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21절과 23절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 구절에 주목하고 싶은 말은 바로 '작은 일'입니다. 우리에게 크고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모든 일이 주님께는 '작은 일'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그분께 '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새삼 겸손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끔 하는 말씀입니다. 무조건 못한다고 물러서는 것이 겸손이 아니라 작은 일이라도 자신의 능력에 알맞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겸손임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내 자신의 모습을 솔직히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탈렌트를 셈하기보다는 주님께서 나의 모습을 보시고 던져 주신 당신의 일에 충실하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아무리 크게 여기고, 그 반대로 내가 아무리 하찮게 여기더라도 주님 앞에서는 모두 ‘작은 일’(마태 25,21)임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부산교구 감물생태학습관 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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