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웹진 <인연>에 실린 글입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 글에는 하나의 전제가 있다. 그건 우리가 원든지 원치 않든지 지금 이 순간 누군가의 편을 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평소의 소신이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이라면 이 무슨 황당한 주장이냐며 억울해 하겠지만 진공의 공간에서 홀로 사는 자가 아니라면, 우린 모두 연결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일말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정도의 문제일 뿐 우린 누군가에게 유리하고 누군가에겐 불리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를테면 투표를 한 번도 안 한 사람조차 그의 불투표로 그는 투표의 결과에 참여해 왔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다. 열 명 중 세 명이 투표를 하고, 일곱이 기권을 하였을 때, 일곱은 기권이라는 그 행위를 통해서 세 명으로 이루어진 선거의 구도를 지지한 것이다. 기권이 적극적인 투표행위와 하등 다를 바 없이 투표의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는 말이다. 편들지 않는 자는 편들지 않음으로 강자와 약자의 불평등, 혹은 현 상태를 지지하고 있다. 편들지 않는 자는 없으나, 편들지 않고 있노라 착각하고 있는 자가 있을 뿐이다.

이주 노동자의 편을 드는 텔레비전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짧은 분량의 뉴스 꼭지에 속한 더 짧은 나눔이었다. 그리고 방송이 나가고 며칠이 지난 뒤에서야 나는 다시보기를 통해서 인터뷰 내용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뉴스클립의 아래에는 수많은 댓글이 달려 있었다. 나는 너무 많은 이가 남겨 놓은 댓글에 압도되었고, 댓글을 단 사람 중에 절대다수의 사람이 외국인에 대한 혐오를 날 것으로 표현하는 사태에 당혹하였다. 댓글을 읽고 이어서 뉴스를 클릭하였으나 뉴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상처를 후비는 날카로움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아프다고 외치고 있으나 보는 사람들은 시끄럽다는 퉁방으로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나는 멍했다. 모든 아픔이 부질없는 신음처럼 들렸다. 모욕감을 느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미친 소리에 다름 아닌 혐오와 증오의 댓글들보다 무댓글의 부재가 더 아프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혐오의 폭력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침묵이 점점 더 무겁고, 두꺼워졌다. 크고 무거운 소리가 느리게 움직였다. 침묵이었다. 침묵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큰 소음이 나의 가청능력을 넘어서 둔중하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건 조금씩 조여 오는 벽이었다. 한편을 가두고 가둔 자 위에 검은 그늘을 드리우는 벽.

(이미지 출처 = Pixabay)

힘센 자의 편을 든다는 게 단세포들처럼, 또 바보처럼 깃발을 들고 목소리를 높인다는 뜻은 아니다. 정말 똑똑한 이들은 편을 안 드는 듯 편을 든다. 그들은 조용하다. 가끔 한마디씩 덧붙이며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지만, 이번에 이건 좀 너무한 거 같아’라며 소수에게 한 방씩 먹이며 다수에 아부하는 기술도 부린다. 물론 이들은 아직 하수다. 이들보다 고수는 따로 있다. 이들은 다수를 거슬러 소수의 편을 들어 주기도 한다. ‘이래선 안 된다’며 정의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한마디 거드는 것이다. 미묘하다. 절대 금을 넘지 않으며 소수의 편까지 드는 신공. 이들이 고수인 이유는 이렇게 세상을 속이는 것에 더해서 자기 자신의 양심까지도 마사지해 내는 데 성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수 중의 고수라고 할 수 있다.

이주 노동자들은 왕따다. 세상의 모든 왕따가 그러하듯 그들은 배경을 채워 주되 시간이 되면 조용히 사라질 것을 요구받는다. 그들에겐 앉을 자리가 없다. 그들이 해 주어야 할 일이 있을 뿐이다. 돈을 받았으니 사라져야 한다. 그들에겐 가족도, 인간의 수다한 욕구도 다 꺼내지 말아야 할 구질구질한 개인사다. 하지만 그들이 인간의 자리를 말하기 시작하면, 그러니까 ‘우리 자리’의 한구석에 엉덩이를 들이밀면 질서가 깨어지고 긴장이 시작된다. 이들이 일까지 놓아 버리면 곤란하니 우린 난감하다. 달랠 것도 소리칠 것도 없이 대부분 슬금슬금 자릴 피한다. ‘다 알아’라고 말하며 얽혀 드는 건 끔찍하다.

다시 전제. 우린 편을 들고 있다. 왕따가 있는 세상에서 아무 짓도 한 적이 없는 우리는 다수의 편을 들고 있다. 가끔 말을 한다. 왕따 반대라고 외칠 때도 있다. 이 허망한 외침의 본질은 멀리 갈 것 없는 속담에서 그 본질이 쉬이 발각된다. ‘세상에 가장 얄미운 이들은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다.’ 세상에 가장 치사한 편들기가 그러지 말라고 한마디 거들며 자기 갈 길로 가버리는 짓이다. 나도 그의 편이라며 그의 편을 들지 않기. 이쯤되면 아니 뭐 이렇게까지 욕을 먹을 짓을 과연 내가 했는가 되물으며 슬슬 부아가 올라올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절대다수가 여기에 있다. 차라리 이주노동자들 꺼져버리라고 악의적으로 댓글을 다는 이들은 순진하고, 무식할 뿐. 이주노동자의 비인간적 처우로 혜택을 받는 이들, 그러니까 그들에게 빚을 진 이들은 노동자 옆에서 같이 일하고 있는 가난한 공장의 사장님만이 아니라 그 사장의 갑인 조금 큰 회사, 그리고 그 회사의 원청인 더 큰 회사, 그렇게 쏜살같이 곁을 지나는 우리 사회 전체다. 다만 모든 구질구질함을 자세히 알고 싶지 않을 뿐. 2020년 대한민국, 우리가 뜯어내는 박스, 비닐봉지, 플라스틱 컵 등등 우리 소비의 말단에는 이주노동자들의 지문이 찍혀 있다. 그들 없이 싼 물건은 생산이 안 된다.

 

이근상(시몬)

예수회 사제, 이주노동자지원센터 이웃살이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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