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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DNA

오늘부터 3주마다 '큘라, 부모님을 넘어서다'를 5회 연재합니다. 나이 오십을 넘어서야 부모라는 큰 산에 익숙해지고 부모에서 비롯된 지난 트라우마들을 돌아볼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는 최금자 씨. 육십이 돼서야 그 산에서 내려오고, 이제 어머니와 화해하고 온전히 독립한 삶을 살아내는 과정을 담고자 합니다. 기고해 주신 최금자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부모님이라는 큰 산이 무너지고 있다. 부모님은 슬하에 3남 2녀를 두셨다. 

2019년 2월 23일 아버지가 향년 92살로 사전 예고 없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막내딸인 나에게 여성성과 남성성을 동시에 보여 주신 분이다. 냉정하고 완벽한 성격의 엄니로 인해 애정 결핍에 시달리며 고통받는 어린 딸이 안쓰러우셨는지 당신 곁을 내어 주셨다. 엄니의 냉정함 때문에 ‘혹시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가 아닐까’ 하고 의심했는데 김동인의 단편소설 '발까락이 닮엇다'의 그 아이보다 더 많은 부분이 아버지와 닮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아버지처럼 냉한 체질이어서 가을 초엽이면 벌써 내복을 입는다. 중년이면 나잇살이 붙는다고 하지만 살은 차치하더라도 체중 미달이나 면했으면 한다. 이 또한 아버지를 닮았다. 신체조건이 어쩌면 아버지와 붕어빵인지. 그런 나를 보며 엄니는 계절에 맞지 않는 두꺼운 옷을 입는다며 늘 타박하신다. 

내가 나에게 지은 별명 중 하나가 ‘형광등’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 형광등은 백열등과 다르게 불이 들어오려면 깜박깜박하는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느린 행동거지가 가끔 불편하다. 하지만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사는 한국인의 습관에 되도록 편승하고 싶지는 않다. 자린고비까지는 아니셨지만, 한 푼이라도 싼 물건이 있으면 배낭을 메고 대중교통으로 멀리까지 장을 보시던 아버지. 한번은 배낭이 너무 무거워 걷기가 버거워지자 같은 건물에 사는 언니를 전철역까지 나오라 해서 대신 배낭을 들고 가게 하셨단다. 난 그런 면을 아버지에게 물려받지 않아서 다행이다. 자식뿐 아니라 남들에게도 정이 많았던 아버지. ‘자신의 이마에 땀 흘리지 않는 자는 먹을 자격이 없다’라는 바오로 성인의 말처럼 평생 근면, 성실, 정직 그리고 꼼꼼함으로 일관되게 살아오신 아버지. “저에게 그 많은 장점을 물려주셔서 고맙습니다!”

2014년 당시 85살이었던 아버지. 본인이 원하는 비율(커피, 설탕 그리고 프림)로 탄 커피가 가장 맛있다고 하셨다. 딸바보셨던 아버지는 막내인 나를 유난히 예뻐하셨다. 수수깡처럼 깡마른 아버지는 평생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최선을 다하셨다. ©최금자

아버지가 귀천하시고 2년이 채 안 된 올해 6월부터 아버지와 세 살 차이인 엄니가 무너지기 시작하셨다. 2월 말 코로나19를 피해 능동 엄니 집에서 본죽리 우리 집에 오셨다. 석 달을 우리 부부와 함께 계시다가 심한 복통으로 구급차를 타고 건대병원에 입원하셨다. 여러 검사 결과, 엄니는 간과 담낭 그리고 그 연결부에 결석이 발견돼 담낭 제거 수술을 받으셨다. 다행히 수술은 잘 진행되었으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평소 안 좋았던 신장이 수술 전후로 여러 번 실시한 검사의 조형제 부작용 때문에 기능이 제로로 떨어졌다. 그로 인해 주 2회 투석해야 했고 퇴원 뒤에도 통원치료를 했다. 이때부터 엄니와 세 아들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세 아들이 번갈아 가며 엄니를 간호했다. 문제는 병원 갈 때마다 휠체어를 탄 엄니를 두 아들이 앞뒤로 들고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60-70대인 오빠들이 나이와 요령 부족으로 허리에 과부하가 걸렸다. 주 2회에서 3회로 투석 횟수가 늘자 오빠들은 통원치료가 무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마음이 무거웠지만, 8월 20일 투석이 가능한 요양병원을 다행히 큰오빠 집 근처에서 찾았다.

코로나19로 면회가 전면 금지돼 요양병원 입원 후 엄니와 맞대면을 하지 못한다. 하루에 3번 오빠들이 전화하여 엄니의 안부를 묻고 몸 상태를 확인하는 것밖에 달리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와 언니는 가끔 전화하고 엄니가 좋아하시는 음식을 병원에 갖다 주며 아쉬움을 달랜다. 나는 전화할 때마다 평소 엄니가 좋아하시던 노래를 연습해서 불러 드린다. 지금까지 열여섯 곡을 불렀다. 초기 치매 증상을 앓고 있는 엄니는 식사할 때와 투석을 받으러 치료실에 갈 때 외에는 종일 누워서 자다가 깨다가를 반복하신다. 유일하게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시간이 바로 자식들과의 전화 통화다. 외부 자극이 적으니 치매가 나날이 악화하고 있다. 조금 전에 드신 음식물 내용이 뭔지 물으면 “몰라”라고 답할 때가 많다. 영민하셨던 엄니의 기억력이 점차 흐려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 가슴이 아프다.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을 불러드릴 때 눈물이 터져 나오는 것을 입술을 깨물며 간신히 참았다. 내 울음소리를 듣고 엄니도 우실까 봐. 다행히 기분이 좋으신 날은 내 노래에 ‘얼~수, 좋~다’ 하며 추임새를 잊지 않으신다. 엄니는 1950-60년대 만담가로 유명했던 고춘자와 장소팔의 흉내를 잘 내셨다. 본죽리에 계실 때도 혼자서 판소리, 흘러간 가요 등을 흥얼거리셨는데 병원에서도 그 흥과 끼가 작동하니 다행이다.

2019년 3월 26일, 남편 베드로와 함께 엄니와 화개장터를 둘러보고 산수유 마을을 방문했다. 매해 춘삼월이면 엄니를 모시고 하동 화개장터를 다녀왔다. 엄니는 젊은 시절 약수동 시장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해서인지 유난히 시골 장터 방문을 좋아하신다. 이 나들이가 엄니와 하는 마지막 여행이 될 줄 몰랐다. ©최금자

어린 시절 자식들에게는 완벽주의를 강행했던 엄니는 집으로 동냥하러 오는 이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셨다. 그 당시 부모님이 시장에서 쌀장사를 하신 덕에 집에 쌀이 떨어지는 일이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는 엄니의 측은지심이 이웃에게는 잘 발동했다. 또한, 엄니는 큰손이다. 손이 커서 음식을 하면 많은 양을 하고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었다. 본죽리 우리 집에 와 계실 때도 국을 한 냄비 끓여서 몇 날 며칠을 질리도록 먹었다. 음식만이 아니라 돈 씀씀이도 커서 기본 단위가 만 원이 아니라 십만 원대다. 엄니 수중에 여윳돈이 넉넉했다면 70-80년대 강남 복부인들처럼 부동산에 투기해서 자식들이 그 득을 크게 봤으려나. 그러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내 삶에서 돈은 영 순위가 아니니깐. “나에게 물리적인 자산보다 지적 호기심과 유머를 물려준 엄니, 고맙습니다!”

부모님이라는 큰 산이 무너지고 있는 그곳에 ‘나’라는 산이 서서히 서고 있다. 내 DNA에는 엄니와 아버지의 긍정적, 부정적인 기질이 혼합되어 버무려져 있다. 그중 40퍼센트는 아버지로부터, 나머지 60퍼센트는 엄니로부터 취한 것 같다. 내 나이 50대 고개를 넘으면서 그 전에는 어찌할 수 없었다고 여겼던 그 기질을 더디지만 내 체질에 맞게 바꾸고 있다. 그 시기가 더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2014년 3월 인천에서 살 때 장난기가 발동하여 베드로와 함께, 자전거용 복면을 쓰고 코믹한 모습을 연출했다. 오랜 세월 내면에 잠재해 있던 끼가 나도 모르게 팡팡 터져 나온다. 흥이 몸에 배신 엄니를 닮아서인가? ©최금자

 

최금자(엘리사벳) 
주일학교 교리교사를 시작으로 40년 동안 청소년들과 희로애락을 나누고 있다. 2016년에 귀촌하여 본죽리에 살고 있다. 인생의 동반자 베드로와 함께 2010년부터 6년 동안 인천에서 무료 붙박이 ‘어린이 카페 까사미아’를 열었다. 70대 이전에 ‘무빙 까사미아’를 열어 청소년들과 함께 길 위(한반도-아시아-유럽)에서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며 삶을 나누고자 한다. 현재 (아)줌마들과 수다로 각자의 일상을 나누며 함께 성장하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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