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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질문[변영국의 세상만사 인생사]

내가 내 딸을 사랑하는 이유는 참 많이 있다. 거의 회생 불능의 성적으로 점철하다가 말도 안 되는 급반전을 통해 그리 나쁘지 않은 대학에 들어간 것도 그렇거니와, 중학교 때는커녕 고등학교 때에도 학원 한번 보내지 않은(정확히 얘기하면 보내지 못한) 애비의 무능을 탓하지 않는 것, 시시때때로 엄마 아빠가 자랑스럽다고 얘기해 주는 것,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또래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 등등..

그런데 오늘 내 딸이 참 낭패스러운 얼굴로 이렇게 얘기를 걸어왔다.

“아빠 혹시 재즈음악에 대해서 잘 알아?”

물론 잘은 모르지만 예전에 대학로 근처에 있던 카페 ‘야누스’에서 더러 국내 굴지의 재즈 뮤지션들의 음악을 들은 바도 있고 특히나 이브라힘 페레니 루벤 곤잘레스니 하는 (이미 고인이 되신) 쿠바 어르신들의 이야기, ‘브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그 음악이 좋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 터여서 뭔가 얘기할 거리를 찾으려 하는데 딸네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재즈에 대해서 하나도 몰라. 그런데 내 친구 ㅇㅇ이는 재즈니 클래식이니 모르는 게 없어. 나는 밤낮 유행가나 듣고 있는데 말이지...”

생각해보니 나 역시 클래식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작품번호 몇 번’이니 ‘심포니 오케스트라’니 하는 얘기가 나오면 뭔 말인지 모르기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니 엄격한 화성법을 좆는 클래식과 즉흥 연주를 기본으로 하는 재즈는 근본부터 다르다는 둥, 대개의 경우 클래식은 백인들의 것이고 재즈는 흑인들의 것이라는 둥 겉껍데기를 주워섬겨 봐야 친구에게 묘한 열등감을 느낀 딸아이를 위로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데 내 입에서 나간 얘기는 전혀 뜻밖이었다.

“아 이 녀석이 헛소리를 하고 있네. 야 임마. 유행가가 어때서 엉? 너 김정호의 ‘이름모를 소녀’ 알아? 김현식의 ‘내 사랑 내곁에’ 모르지? 이 녀석아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은 거의 교향곡이야 교향곡.”

딸한테 무척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사실 교향곡의 정의도 모르면서 그렇게 냅따 쏴붙였다. 게다가 점입가경이 따로 없었다.

“아빠는 임마 이해가 안돼. 루치아노 파바로티인가 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왜들 그렇게 생난리를 쳤는지 말이야. 그게 우리 노래냐? 도대체 언제부터 그 사람을 그렇게 좋아한 거야 우리 백성들이....”

나는 지금도 왜 내가 ‘루치아노..’와 ‘김현식’을 갈라놓았는지 참 모르겠다.

나는 왜, 단 한번도 내가 청해서, 혹은 자발적으로 그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으면서 루치아노의 노래를 다 아는 것처럼 딸한테 떠벌였을까? 그것은 결코 루치아노의 노래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대단한 테너 가수가 타계했다는 비보를 절절하게 전하는 매스컴의 보도에 혹해 슬픔을 곱씹어대는 일단의 무리들과 과연 다른가? 그 무엇보다 나는 왜 내 사랑하는 딸 앞에서 그렇게 광분(?) 했을까? 단지 재즈, 혹은 클래식을 제 친구보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위로를 받으려던 딸의 머쓱했던 표정이 생생하다.

생각해 보니 대학 때 그 무엇보다 우리의 소리와 우리의 풍물이 제일이라고 믿었고, 꺼떡대는 부자보다 가난하고 조금은 지저분한 사람들 속에 예수님이 계시다고 믿었고, 새침을 떨거나 과묵한 체 하는 것 보다 질펀하고 솔직하게, 때로는 육두문자를 남발하는 것이 훨씬 더 인간적인 것이라고 나는 믿어왔다. 그리고 내 친구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내게 그 믿음은 여전히 유효하고 익숙하다. 여전히 진리이고 청청하다. 헌데 내 딸은 그게 아니었나보다. 내 딸의 친구들은 내 친구들과 아주 다른 모양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을 보며 아빠와 심도 깊게 얘기를 하고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들이야말로 지독한 민족주의 정서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제 스스로 알아낸 기특한 딸네미가 바야흐로 클래식 앞에서 힘겨워하고 있다. 이거 참 낭패다. 딸을 위해서, 생뚱하지만 복장을 갖추고 저명한 클래식 연주회에 가야하나보다. 아니, 꼭 가야한다. 그것이야말로 되도 않는 이야기들로 나의 시대와 나의 이데올로기를 딸네미한테 합리화하는 작태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기 때문이다.

/변영국 2007-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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