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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중국 합의와 교황 도덕적 권위의 문제핵심은 도덕 아닌 ‘교회 주권’
교황직을 도덕성의 측면으로만 보면 부분만 볼 뿐 아니라 위험하기도 하다. (사진 출처 = AFP)

(미셸 샹봉)

교황청과 중국이 2018년에 맺었던 중국 주교 임명에 관한 임시 협약이 곧 갱신될 가운데 염려와 비판이 많다.

홍콩과 신장의 상황에 비추어,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중국이라는) 중세 왕국에서 저질러지는 수많은 불의에 대해서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로마가 중국에서의 인권과 종교자유 침해에 대해 계속해서 눈을 감고 한편으로는 중국과의 임시 협약을 연장한다면 도덕적 권위를 잃을 것이라고 본다.

분명히, 현재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걱정스럽다. 가톨릭 성직자들이 국가 통제 하에 있는 중국천주교애국회에 가입하라는 압력을 강하게 받는다는 증거가 많다. 지난 몇 달 새만 해도, 중국은 홍콩특별행정구의 자치성을 심각하게 훼손했으며 홍콩의 민주화 운동가들이 침묵하도록 힘을 동원했다. 또한 서북부의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는 엄청난 수의 이슬람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제 불임시술과 낙태 등은 절대 가볍게 대할 사안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 글에서 도덕적 권위의 논의 그 자체를 성찰해 보고자 한다. 비록 교황청의 중요성이 그 도덕적 권위에 의거하고 있음을 그 아무도 부인하지 못함에도, 나는 교황(의 의미)을 도덕의 보편 증거자로 한정시키는 것의 위험을 부각하고자 한다. 

분명히, 그리스도교 신앙은 윤리적 행위와 공동선을 향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큰 연관이 있다. 하지만 교황직을 그 도덕주의적 특징을 통해서만 보는 것은 부분적일 뿐 아니라 위험한 관점이다. 나는 그런 관점은 성좌(교황좌)의 실제 기능을 왜곡시키고 일련의 문제적 가정들을 강화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나는 네 가지 시각에서 도덕적 권위의 문제를 살펴보고, 각기 그리스도인들이 주의해서 물어야 할 가정 하나씩을 중점 조명한다.

첫째, 교황의 도덕적 권위에 관한 논의는 정치학의 시각에서 평가되어야만 한다. 역사학자들은 가톨릭교회가 교황령을 잃은 뒤로 교황은 국가권력의 주 원천을 구성하는 영토와 그에 따른 수입원을 갖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이들이 보기에, 교황청은 통상적인 주권 국가가 아니고, 교황청이 세상사에 개입하는 합법성과 자격은 주로 그 도덕적 권위에 의존한다.

이 주장의 기초에 있는 정치이론은 여러모로 문제가 있다. 바티칸시국은 여러 특이성이 있는데 이를 일반적 국민국가에 대비함으로써 이 담론은 국가권력이 두 가지 근원에서 나온다고 이야기한다. 

물질 가치(자연자원, 인구, 생산수단)와 비물질 가치(정치이념, 역사)다. 하지만 이 이론은 몽테스키외가 정리한 삼권분립 개념과 어울리면 어떻게 되는가?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은 물질 가치인가 아니면 비물질 가치인가? (역자 주- 교황이 세속 군주로서 이탈리아 중북부 절반을 지배하던 교황령은 이탈리아 통일과정에서 1870년에 이탈리아에 흡수, 소멸했다. 교황청이 1929년에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와 라테라노 조약을 맺어 지금의 자그만 영토와 약간의 ‘국민’을 가진 바티칸시국이 생겼다.)

만약 우리가 마셜 살린즈의 인류학적 분석 개념인 “큰 사람”(big man, 주요 인물)이나 피에르 부르디외의 교육사회학 개념을 쓴다면, 정치 구조는 한 사회의 규모와 그 친족제도, 그리고 합법화된 폭력의 형태에 따라 결정된다. 항구적 직무의 창조와, 개인적 특권의 축적 또는 계보의 수립을 통해, 인간 사회는 폭넓은 범위의 문화적 도구를 사용해 권위를 형성하고 그 구성원을 통제한다. 즉, 국가권력은 하나나 둘의 성질로 되어 있지 않다.

분명히, 교황은 티베트 불교의 달라이라마나 이슬람의 대이맘 아마드 알-타예드와 마찬가지로, 도덕적 권위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는 또한 (그들과 달리) 180여 나라와 대사를 교환하고 있는 교황청(바티칸시국)이라는 주권국가의 수장이기도 하다. 그는 13억에 이르는 가톨릭 신자의 네트워크 중심에 있으며 전 세계 가톨릭 성직자에 대해 상당한 권위를 행사한다. (교황직의) 오랜 역사적 연속성 덕분에, 교황은 값을 따질 수 없는 역사 문헌들과 걸작들을 보호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교황은 단순한 한 도덕적 주요 인물이 아니다. 교황을 이러한 모습으로만 보는 이들의 지능은 딱 바티칸을 바티칸이 소유한 군사력으로 평가했던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수준이다.(역자 주- 소련공산당 서기장이던 스탈린은 (공산주의 소련을 더 두려워해 소련의 적인) 나치에 무관심한 비오 12세 교황을 설득하기 위해 그리스도인 박해를 완화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오호! 교황! 도대체 그에게 사단이 몇 개나 있다고?”)

둘째, 도덕적 권위에 대한 강조는 종교학의 관점에서 살펴봐야만 한다. 서양 근대성의 상당 부분은 종교를 단순한 도덕 추구로 축소하는 세속적 경향에 바탕을 둔다. 세속 사회과학자가 보기에, 인간은 선행을 장려하고자 하기 때문에 종교적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종교는 한 사회의 행위규범을 강화하고 절대화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법은 풍부한 종교 현상들을 단순화한다. 요즘에는 근대에 종교를 도덕화한 결과 종교 전통들과 그 신들이 지닌 엄청난 다양성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고 지적하는 학자들이 많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라고 하는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했던 역할은 불교 안에서 보살의 하나나 이슬람 안에서 쿠란, 중국의 대중 종교에서 태산과 같은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 세속 담론은 꼭 선하거나 악하기만 한 것이 아닌 신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중국의 전통 신 가운데는 천당이나 지옥에 있는 신들이 있는데 이들은 본래 꼭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다. 도덕성이 핵심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이들은 그 속성이 모호하고 폭이 넓다. 이들이 신이 되기에 중요한 것은 사물에 작용할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이다.

달리 말하자면, 종교는 단순한 도덕성의 문제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종교는 모두 윤리적 딜레마들에 관여한다. 하지만 종교는 그 이상을 한다. 그리고 성좌도 그리한다! 성좌의 사명은 세속 담론에서 주장하는 것보다 더 넓다. 우리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도덕성에 대해 더 말을 많이 할수록 복잡한 구체 상황들을 처리하던 예수의 모범을 우리가 덜 보게 된다는 점을 잊지 말도록 하자.

여기에서 나는 세 번째의 논점으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가 도덕성의 이해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바티칸을 도덕의 증거자로 끊임없이 제시하는데, 이때 우리는 윤리를 자명한 실제라고 볼 위험이 있다. 도덕성은 선한 행위, 누구나 다 아는 보편적 진리와 관련된 무엇이라고 가정된다.

다시금, 이러한 가정들은 문제가 있다. 만약 우리가 도덕성을 선한 행위라고 이론적으로 규정하는 가정된 규칙과 원칙의 모음이라고만 본다면, 그 내용을 정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사형폐지를 주장하는) 교황청이 사형제를 실시하고 있거나 핵무기를 갖고 있는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우리는 도덕 원칙들을 정식화하는 것은 늘 그 원칙들을 명료하게 정리하고 문장화하는 이들과 연관돼 있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달리 말해, 윤리 규범은 그것을 정식화하는 하는 이들의 인류학적, 신학적 세계관에 그 뿌리가 있다. 일부 보편 규범이 존재하긴 하겠지만, 그런 규범이 과연 몇 개인지, 본질은 무엇인지, 그리고 상호 간 위계는 어떤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도덕적 행위는 윤리적 판단과 원칙들을 구체적 환경과 개인의 존재 안으로 실행하는 문제다. 복음에서, 예수는 보편 법과 특정 상황 간에 놓인 긴장에 끊임없이 관여한다.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의 보편적 부르심을 부분적으로 반영하는 도덕 원칙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도덕적 판단과 행위가 절대 “누구나 다 맞는”(one size fits all) 모델로 축소될 수 없는지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교황의 도덕적 권위에 대한 걱정이 지겹도록 반복될 때, 이러한 걱정은 성좌를 일종의 상아탑 –또는 황금 감옥- 안으로 밀어 넣을 뿐 아니라 복음으로부터도 멀어지게 만든다. 교황의 도덕적 권위는 도덕적 우월성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가득 찬 교회 안에서는, 법률 조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로부터, 나는 마지막 네 번째 논점을 펴게 된다. 이는 바티칸의 도덕적 권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에 내포된 일종의 교회론과 관련된다. 우리가 교황을 한 사람의 보편 도덕의 증거자, 모든 이에게 무엇이 선인지 말해주는 이로 제시한다면, 이때 우리는 어떤 종류의 교회를 설파하고 있는 것일까? 실로, 교황의 도덕적 권위가 보편적 범위를 지닌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교황을 일종의 편재(어디서나 동시에 존재)하는 사목자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다. 이러한 접근법을 취하면 교황은 모든 지역공동체가 그 특정한 현실이나 동역학이 무엇이든 간에 (직접) 그 공동체들을 이끄는 보편적 사제가 된다. 원래 교황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교회의 일치에 봉사하는 로마 주교인데, 이리되면 교황은 이제 로마 주교가 아니라 진리의 (편재하는) 화신이 된다.

교황의 보편적 재치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 19세기 교회론의 문제는 자신들의 양 떼를 책임진 지역 주교, 사제들의 책임을 제쳐놓는다는 것이다. 또한 교회를 피라미드식 수직구조로 보는 이 관점은, 특정 가톨릭 신자나 비신자에게는 매력적이겠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에 의해 도전받아 왔고 숙고해 왔다. 로마 주교는 주교단을 대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로마 주교는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vorum Dei)이다. 그의 직무는 교회의 주교들에게 봉사하는 것이며 주교들의 일치를 보호하는 것이다. 이 교회 모델에서는, 교회의 최고 권위는 로마의 주교와 일치하여 일하며 사도단을 집단적으로 계승하는 주교단의 손안에 있다.

물론, 바티칸은 교회의 여러 지역 문제와 세계 정치에 여전히 개입한다. 교황은 특정한 불의나 전 세계적인 죄의 구조들을 끊임없이 비판한다. 하지만 바티칸은 성좌의 근본 의무에 대해 명확히 밝혀 왔다. 그것은 지역 주교들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을 지원하고 타이르는 것이다. 성좌의 최우선 책임은 주교들의 일치를 유지하는 것이다.

교황의 도덕적 권위에 관한 담론들과 얽힌 정치, 종교, 도덕, 그리고 교회론적 모호함들을 위와 같이 정리해서 살펴보고 나니, 이제 우리는 다시금 바티칸-중국 합의의 문제를 살펴볼 수 있게 됐다. 바티칸이 시진핑의 중국과 합의를 갱신하면 그 도덕적 권위를 잃을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종교활동에 관한 중국 정부의 정치적 억압에 직면하면서, 그 누구도 그 협약에 진실로 열정적일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중국인 신자들과 시민사회에 대한 위협들은 하룻밤 새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중국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임시협약과 같은 작은 진전들을 쓰레기통에 버린다면, 우리가 취할 대안은 무엇인가? 

중국 가톨릭교회가 지하교회처럼 지하에서만 신앙생활을 하기로 결정한 이들로 대표되도록 둘 것인가? 중국이 (가톨릭 지하교회를 비롯한 여러) 지하의 종파 운동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고려한다면, 이것이 과연 현명하고 도덕적일까? 그리고 진실로 애국적이며, 가톨릭교회와 교황에 진실로 충성하고, 자기 나라의 사회경제적 진보를 자랑스러워하는 이들은 또 어떻게 되는가?

바티칸-중국 합의는 중국이라는 복잡한 정치-종교적 현실 속에서 성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그 핵심 사명으로 규정한 바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협약을 통해 교황은 주교들 간의 일치를 건설하고, 교회의 일치를 복구하고자 한다.(역자 주- 중국 교회는 1950년대 말 이후로 교황의 승인 없이 스스로 주교를 선출하는 공식 교회(애국교회)와 교황에 충성하며 정부의 탄압을 감수하는 지하교회로 분열돼 있다. 공식 교회 주교 대부분도 주교가 된 뒤에는 여러 경로로 교황의 승인을 받았지만, 2018년의 임시합의로 나머지 불법 주교들도 모두 교황 승인을 받은 상태다. 다만 앞으로의 주교 임명 절차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바티칸과 중국 사이에 여전히 협상 중이다.) 

19세기 교회론이나 세속적이고 정치화된 접근법을 적용하는 이들이 불만을 제기하지만, 교황과 교황청은 중국 주교들에게 초점을 두고 있다. 많은 문제와 윤리적 딜레마가 남아 있지만 성좌가 내놓을 수 있는 마법 같은 해결책이란 것은 절대 없다. 교황은 마법사가 아니다.

결론으로, 교황의 도덕적 권위에 대한 선의의 경고에는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지만, 그러한 경고가 성좌의 행동을 규정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다시금 말하지만, 바티칸-중국 대화의 핵심은 교회의 주권이다. 임시협약의 갱신 그 자체 뒤에는 아시아를 비롯한 각지 교회 - 오직 한 분뿐이신 주님인 그리스도의 몸-의 미묘한 자치를 표현하고 실행할 길을 찾으려는 핵심 문제가 놓여 있다. 이것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따르는 로마 주교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권의 모색이야말로 –그 경제, 정치, 신학, 교회론적 파생 문제와 더불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과제인 것이다.


(미셸 샹봉은 프랑스의 가톨릭 신학자이자 인류학자다. 이 글에 담긴 관점들은 필자의 것이며 <아시아가톨릭뉴스> 편집진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다.)

기사 원문: https://www.ucanews.com/news/the-holy-see-china-and-the-question-of-moral-authority/89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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