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일의 책과 시대정신] 내 마음의 태풍...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자율형 사립고가 생기고, 국제중학교가 생겨나면서 대한민국은 가히 입시의 전쟁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형국에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께서 지난 2009년 7월 2일 대교협 하계 세미나에서 “한국교육이 잘되고 있다는 게 소문났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두 번이나 한국교육을 본받으라고 했다.”는 발언을 하셨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두 번이나 한국교육을 본받으라고 했다고..

초등학교가 여름방학을 맞아 6학년을 중심으로 보충수업, 특별반 운영 등을 실시한다는데, 그것을 본받으란 말인가. 학교수업, 과외, 학원, 보충 수업 등에 떠밀려 4~5시간도 자기 어려운 한국 청소년들의 불행한 현실을 본받으란 말인가, 두발 단속, 복장 단속, 아침 자율학습, 야간 자율학습, 보충수업, 교내 특별구역 청소 등 대한민국의 권위주의적 교육문화를 배우라는 말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로 23만 3000원을 아낌없이 지출하는 대한민국의 비정상적인 교육열을 배우라는 말인가.

밖에서 볼 때는 대한민국의 교육현실이 멀쩡해 보일 수도 있겠다. 2008년 기준, 중학생의 고교진학률은 사실상 100%이고, 고교생의 대학진학률도 84%에 육박한데다,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국민들이 100명중 30명이라지만 대한민국의 교육열은 가히 세계최고가 아닌가.

그러나 오바마가 대한민국 고등학교에서 머리털을 깎여봤겠나, 아님 엎드려뻗쳐에 비지땀을 흘려봤겠나, 그것도 아니라면 그가 일요일에도 학교에 나가 자율학습을 해봤겠나, 물 건너에 있는 그가 대한민국 학교의 속사정을 알 까닭이 없다.

좋은 말은 교과서에는 있다. 그러나 학교에는 없다. 교실에도 없다

공생의 의미를 아는 인간,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민주시민, 민주적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자율적 인간, 문학과 예술을 아는 심미적 인간을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다. 좋은 말은 교과서에는 있다. 아예 차고 넘친다. 그러나 학교에는 없다. 교실에도 없다.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결핍의 현실이 자꾸 ‘여고괴담’류의 호러무비와 소설과 같은 서사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결핍의 서사는 아프고 쓰리다. 마치 불온서적을 읽는 것처럼 과히 편하지가 않다. 누군가에게 검열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편안한 독서를 방해한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대한민국 청소년 문학 독서 시장에는 결핍의 서사가 많지 않다. 사계절에서 재출간된 <내 마음의 태풍>과 신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는 그 많지 않은 결핍의 서사 가운데 하나다.

<내 마음의 태풍>의 배경은 유신체제 말기인 1970년대 후반이다. 그 시절에 고등학교를 다녔던 필자의 친구나 동료들 중에도 그 시절이 좋았다고 회고하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물론 그 시절에 입시경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과외나 보충수업을 받을 수 있을 만큼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시절은 엄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폭력은 일상이었다.

권위에 대항하려면 여간한 ‘깡다구’가 필요한 시절

유하 감독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가 보여주듯 툭하면 ‘원산폭격’에 ‘빳따’였다. 권위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여간한 ‘깡다구’가 필요한 시절이 아니었다. <내 마음의 태풍>은 학도호국단으로 상징되는 그 시절의 질곡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자칫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회고적 낭만주의와 감상주의와 섞이기 십상이지만 이 소설은 그런 위험을 현명하게 비껴간다. 그림에 소질이 있고 낙천적인 김민기, 순수하고 여린 시인 지망생 한경민, 매사에 태평하고 명랑한 윤재국, 형이 교도소에 수감돼 세상을 일찍 안 김정희, 이 들의 네 명의 주인공들은 문집 ‘태풍’을 만든다.

‘태풍’은 무엇인가. 이들에게는 단순한 문집 그 이상의 것이었다. 억압당한 꿈과 욕망, 가슴에 짓눌렸던 응어리, 채 울음으로 새어나오지 못한 울음이 곧 태풍이었고, 말하고 싶었어도 말하지 못한 말, 외치고 싶었어도 외치지 못한 외침이 곧 태풍이었다.

어른 세대들은 청소년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한다. 그러나 어른 세대들은 줄기차게 청소년들에게 입시와 성적이라는 현실을 강요한다. 1970년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내 마음의 태풍>이 현재성을 갖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1970년대가 언젠가. 바로 성장만이 능사였던 시대였다. 2009년의 현실은 그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자사고, 외고, 과학고, 국제고에 자율형 사립고 100개가 더해지면..

2011년까지 자사고, 외고, 과학고, 국제고에 자율형 사립고 100개가 더해지면 평준화는 해체되고 고교 입시가 사실상 부활하게 된다. 어떤 보수신문의 주장처럼 수능성적을 학교별로 공개하여 전국의 고등학교를 수능성적이라는 기준으로 일렬로 줄 세우기가 가능해지면 토론식 교육이나 대화식 교육, 자신의 재능을 개발하고 건전한 심신을 키운다는 목적으로 생겨난 특기적성 교육, 역시 찬밥신세가 된다. 바로 이런 현실이 <내 마음의 태풍>이 다시 읽힐 수 있는 자리다. 재출간이 의미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내 마음의 태풍>이 고등학생들의 자치 문집인 ‘태풍’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서사라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는 인터넷 학교신문인 ‘목소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서사다. 두 소설 모두 문집과 신문이라는 매체가 서사의 주요한 모티프가 되고 있다. 매체란 자신들만의 목소리와 주장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학교 현장에서의 매체들이란 교육 권력자들의 목소리를 일방적으로 전하는 매체일 뿐이다. 교지가 그렇고, 학교 홈페이지가 그렇고, 학교신문이 그렇다. 그 속에 학생들의 속 깊은 목소리와 칼라는 없다.

‘태풍’과 ‘목소리’는 그런 얌전하고 고분고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다. 그렇다고 ‘I’m a loser baby, so why don’t you kill me?’와 같은 식의 반항적인 하드록의 샤우팅이나 힙합의 하위문화적인 상소리를 마구 내뱉지도 않는다. 사뭇 진지하기 이를 데 없다. 물론 이 진지함은 이 소설들의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하다. 어떤 비극의 순간에도 웃을 줄 아는 인간들이 곧 청소년들이 아닌가. 그들의 나이는 천성적으로 낙천적이고 발랄할 수밖에 없는 나이다. 그러나 이 두 소설에서 현실의 무게가 그들의 발랄함을 앗아간다.

"미안해"..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의 작가는 분노와 슬픔, 부끄러움의 힘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현실은 고통스럽기 이를 데 없지만 어른들은 ‘사회와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은 당연하다’는 논리로 짐짓 아무 일도 아닌 듯 모른 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웃음’은 현실에 대한 응전이 아니라 현실로부터의 도피일 수도 있겠다. 두 소설 모두 웃음의 전략 대신에 비장의 전략을 택했다. 학생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대한민국의 교육현실에 정면으로 부딪혀 보겠다는 심산이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는 고등학교 2학년 찬오가 자살함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된다. 찬오는 죽기 전 1학년 때의 반 친구를 찾거나 전화를 걸어 "미안해"라는 말을 하지만 누구도 그 말에 신경 쓰지 않는다. 찬오에게 "미안해"라는 말은 살고 싶어, 살 수 있게 도와달라는 구원의 절규였던 셈이다.

찬오의 죽음에 모두가 쉬쉬한다. 학교 홈페이지 안에 있는 인터넷 학교신문 ‘목소리’ 역시 침묵한다. ‘목소리’의 편집진인 학생기자단은 학우의 사망 사건을 놓고 편집회의를 열지만 침묵만 흐를 뿐이다. 지도교사인 서용현 선생이 단순 보도 기사를 내보내자는 결정이 났는데, 회의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영우가 나서서, 찬오의 자살에 대해 기획특집 기사를 내보내자고 주장한다.

소설은 민제와 영우, 승욱이가 기획특집을 각자 1회씩 작성하여 모두 3회 내보내기로 한 후 벌어지는 우여곡절을 보여준다. 바로 이 우여곡절을 들여다보는 일은 학교의 폐쇄성과 비민주성을 들여다보는 일에 다름 아니다. 결국 ‘목소리’는 폐쇄된다. 그러나 이런 비극적 결말 때문에 이 소설이 우울하게 읽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설은 비극을 통해 희망을 말한다. 청소년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은 ‘목소리’가 만연한 현실이 오히려 비극이 아닐까. ‘목소리’의 폐쇄는 아직도 그들에게 희망이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내 마음의 태풍>이 1970년대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간파하고 폭압적인 시대를 넘어 자신들의 꿈을 표현하려 했던 청소년들의 시도를 진지하게 보여주었다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는 강태준 교사가 이끄는 1학년 8반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밀도 있게 묘파함으로써 성적 지상주의, 입시 위주 교육의 억압성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있다. 두 소설은 모두 비극을 말하고 있지만 모든 비극은 궁극적으로 비극의 종말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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