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내 눈을 번쩍 뜨게 한 몇 개의 회칙들이 있었다. 주일학교 교리교사를 하면서, 정말 열심히 읽었던, '현대의 교리교육', 사회교리의 근간이 된 '노동하는 인간', 그리고 다른 하나가 '찬미받으소서' 등이 그것이다. 특히 '찬미받으소서'는 우리가 지금 사는 세상의 문제를 섬세하게 이야기하고 있어서, 학교 동료들과도 많은 대화를 주고 받았었다. 그리고 이번에 나는 지구에 함께 살며 운명을 나누는 형제애와 사회적 우정에 관해 이야기하는 '모든 형제들'이 나오자, 마음이 설레었다. 모든 것이 나누어지고, 갈라진 세상,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 단절과 소외를 경험하는 인류에게 보내는 교황님의 메세지가 너무 좋아서, SNS에다 함께 공부할 분을 찾는다는 공고를 내었다. 세상 이곳저곳에 살고 있는 친구들이 함께 이 회칙을 읽고 공부할 것을 생각하니 행복해졌다.

하여, 긴 산책을 한 후 돌아와서 책상에 단정히 앉아 마음에 와닿는 곳에 밑줄 그으며 읽을 계획이었다. 이상 기후로 무덥던 날씨도 한풀을 꺾이고, 서늘한 바람, 여기저기 핼로윈을 준비하는 집 앞에는 온갖 유령, 귀신들로 장식되어 있다. 돌아오는 길에 나무를 올려다보는데, 어둠 속으로 내려앉으려 하는 마지막 햇살이 닿는 곳만 아직도 찬란하다. 내 영혼도 빛이 닿는 곳은 저렇게 찬란하길. 그리고 내 영혼의 어둠으로 빛나는 곳을 알 수 있으니, 나의 빈곤함도 축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집에 들어가고 싶었다. 집에 가서 따스한 물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알라메다 병원 앞을 돌아가는데, 내 눈앞에 펼쳐진 물체, 빨간 시트에 돌돌 말려진 그것에 깜짝 놀랐다. 행려자였다. 그리고 그는 아주 젊었다. 나는 괜챦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사람 소리 같지 않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무섬증이 일었다. 어, 경찰에 전화를 해 주어야 하나? 보호소를 찾아 데려다 주어야 하나? 자신이 없었다.그냥 모른 척 지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자리를 얼른 피했다.

저녁 해가 떨어지기 전, 그 마지막 빛을 반은 나무가 찬란히 빛나고 있다. 빛나지 않는 부분이 있으므로 밝은 부분이 있음을 알기에, 저 나무의 어두운 가지들, 그리고 내 내면의 어둠을 담담히 보기로 한다. ©박정은

집에 와서는 길에서 본 그에 대해 까맣게 잊었다. 샤워를 하고 젖은 머리를 말리면서, 행복하게 새 회칙을 다운로드 받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나는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 2장에서 교황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설명하고 있었는데, 그 잔잔한 가르침이 뼈를 때렸다. 이미 시간은 열 시이고, 약간씩 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일단 현재 내가 가진 것 중 제일 따뜻한 재킷을 꺼내 들고, 사용하지 않은 마스크 세 장, 약간의 현금을 가지고 집을 나섰다. 마침 옆집 안나가 강아지랑 산책을 하는 중이어서 함께 가 달라고 부탁을 했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덩치만 커서, 아직 자기 몸이 잘 주체가 안 되는 어린 강아지는 궁금한 게 너무 많아 자주 쉬어야 했다. 조금 안달이 났다. 한편으론 그 젊은이 이미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났기를 바라면서도, 또 한편으론 내 선물을 주고 싶었다.

길을 돌아 그곳에 가 보니 그는 완전히 몸을 똘똘 말아 자고 있었다. 나는 서툰 걸음으로 조심조심 다가가 그의 몸 위에 나의 재킷을 덮어 주었는데, 내 손이 그의 몸에 닿았다. 갑자기 그가 총알처럼 벌떡 일어나며, 무서움에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나를 보고는 “아,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어”라고 이야기했다. 나도 그에게, “나도!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어.” 그렇지, 그가 길 위에서 무서웠구나. 아무도 없이 길에서 누워서 무서웠구나. 아, 그 순간, 그도 나처럼 무서웠단 그 말이 무언가 그를 가깝게 느끼게 했다. 약간 웃음이 나왔는데, 이번엔 그도 나를 보고 웃었다. 그리고 밥은 먹었는지를 물어보았는데, 먹었다고 했다. 이거 새 마스크니까 쓰고 다니라고 하니 또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데, 이번에는 무섭지 않았다. 돈을 주는 것도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닐 것 같았다. 옆에 있던 안나가 자기가 출근 길에 아침을 챙겨 주기로 약속했다. 이토록 젊은, 그리고 아름다운 사람이 왜 이렇게 거리에서 아무도 없이 잠을 자야 하는가 생각하니 맘이 더 짠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그를 인간으로 대하면 그만이지, 내가 할 수 없는 것까지 생각하면서 미리 걱정하고, 피해 가는 일은 이제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조금 가벼워진 맘으로 집에 돌아와서 회칙 2장을 마저 읽었다. 이번에는 조금 덜 힘들어 하면서 읽어 나갔다. 다음 날은 중부에 있는 한 수도회 총회에서 강의가 있어 아침 일찍부터 줌(Zoom) 속으로 들어갔다. 이 수도회는 감사하게도 내가 쓴 수도생활에 대한 책을 함께 읽고 나누면서 총회를 진행했는데, 수녀님들은 내가 쓴 것보다 훨씬 깊이 있게 묵상을 하셨다. 그래서 다시 한번 텍스트의 의미는 독자가 생산하는 것이라는 비평 이론을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쓴 책을 비판하면서, 내용의 빈약함과 상상력 결핍을 힐난하면서, 누군가 이 시간에 새롭게 시작되는 수도생활의 깊이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게 나의 찐 행복임을 명심하기로 했다.

수도생활에 관한 내 책 표지: 우연히 만나 함께 많은 것을 나누게 된 친구가 그려준 책 표지. 내가 강의한 수도회의 어느 창의적인 수녀님이 그 그림에 더 깊은 의미를 보태었다. ⓒ박정은

나는 이 강의에서 작은 것이 아름답기에 거창한 이야기를 지워버리고, 작은 이야기(small narrative)를 다시 모아 보자고 제안했다. 너무 거창한 이야기들, 거대한 이야기 속에, 혹시 복음을 향한 우리의 꿈이, 소박한 상상이 묻혀 버리는 것은 아닌지. 만일 어떤 공동체에서 꿈이 사라져 버렸다면, 그 공동체는 어디서 그런 꿈이 사라져 버렸는지를 되짚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제, 코로나로, 두려움 속에 꿈적하려 하지 않는 우리는 또 어디서 이런 마음을 흔드는 소리가 들리지, 그리고 그 소리가 이끄는 어떤 리듬(나는 그것을 성령의 움직이라고 생각한다)을 찾아가야 한다.

요즘 난 사도 바오로가 쓴 서한들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의 아픔과 혼란, 그리고 실수들이 잘 드러나서, 인간적인 냄새가 나서 좋다. 그리고, 그렇게 교회는 성장해 갔다는 사실이 마음에 와닿는다. 우리는 정돈을 좋아하지만, 새로운 에너지는 혼돈과 의심에서 나오곤 한다. 혹시 너무 순종만 하는 수도자들이 있다면, 거부하는 몸짓으로 새로운 목소리를 꿈꿀 일이다. 그것이 거룩한 순종이다. 난 개인적으로, 꿈꾸는 회원이 없는 공동체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수도공동체는 꿈을 꾸는 집단이고, 꿈을 담는 보루다.

21세기에 아직 어떤 모습의 새로운 수도생활이 우리에게 다가올지 알 수 없지만, 하루하루 영글어 가는 가을의 열매처럼, 어디선가 또 새로운 역사는 시작될 것이다. 그래서 이 지구에 잠깐 머물다 가는 나그네로서, 모두가 자매 됨을 알아갈 것이다. 그래서 난 내 앞에 놓은 이 아름다운 회칙을 '모든 형제들: 형제애와 사회적 우정'이라 쓰고 '모든 자매들: 자매애와 사회적 우정' 혹은 '모든 형제자매들: 형제자매애와 사회적 우정'이라 읽는다. 강의를 마치고 서둘러 어젯밤 그 젊은이가 누웠던 곳에 가 보니, 그는 아무런 자국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어느 곳에든 따뜻하길 기도할 수밖에....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