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시대를 맞이하셨군요. 이제 다른 자리에 있는 나를 받아들이셔야 해요.

예전처럼 빨리 회복되지 않죠. 한번 망가진 장기는 돌아오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기준을 건강하던 시절로 두시면 불행의 늪에 빠지실 거에요.

예전의 내 모습은 그곳에 두시고, 망각에 흘려보내시길....“

 

몸의 이런저런 증상을 대며 예전 같지 않아 의기소침해지고 마음도 힘들다 하는 제게, 의사 선생님이 무심한 듯 건네신 말씀은 제 가슴 한쪽에 오랫동안 남아 있습니다.

네.... 어쩌면 저는 변해 가는 저의 몸과 마음을 외면한 채, 반짝반짝 쌩쌩했던 젊은 시절 그 언젠가에 머물러 지내는 것 같습니다.

젊었을 때의 반짝이던 아이디어, 언제나 으쌰으쌰 할 수 있었던 체력, 작은 것에도 즐겁고 신기해 하며 호기심 가득했던 그 마음에 멈추어 그 기억으로 삶의 기준을 세운다면, 현재의 내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전에는 안 이랬는데....”의 늪에 빠져 불필요한 노력을 반복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망각의 시대라 부르니 뭔가 낭만적인 것 같지만, 사실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기도 합니다.

망각이란, 경험한 것을 재생해 내는 능력이 일시적 혹은 영속적으로 감퇴하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어떤 일이나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을 말하지요.

반대로 경험한 것을 재생하는 능력을 영원히 하고 싶다면 반복적으로 기억을 유지시켜 주면 됩니다. 계속되는 반복으로 단기 기억에서 장기 기억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통해 공부하는 방법을 들어 본 적 있으시지요?

망각은 신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이라고 이야기할 만큼 인간에게는 필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기억하고 소중히 간직하게 된다면 겪게 될 일을 상상해 보셨나요?

 

인간에게 있어 기억은 자연스럽게 혹은 적극적으로 지워집니다.

또는 그 기억 안에서만 살기도 합니다. 심지어 종종 살기 위한 보호 본능으로 기억을 재편집하여 저장하기도 하지요.

종종 이것들은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옛 기억을 쥐고 있는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도 하고, 벌어진 현실 안에서 나 자신을 탈출시키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나 때는~”을 반복하며 행복한 옛 기억 안에서 현실의 불행한 인간으로 살아갑니다.

 

옛날의 기억은 새로운 정보의 기억을 방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행복했던 시간, 성취의 순간들, 엄청난 실수들, 이 모든 기억을 잊어버려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기억을 붙들고 있을 것인지, 망각의 파도에 자연스럽게 흘려보낼 것인지 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망각의 파도. ©왕기리 기자

2020년은 그 어느 때보다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주말’이라는 것은 ‘평일’이 있을 때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제는 마스크를 쓰고 집을 나서는 일, 식료품을 사기 위해 줄을 서서 가게 안의 손님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는 것도 놀랍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놓치고 살던 것에 소중함을 다시 깨닫고, 어렵게 느껴지던 것에 적응도 한 것 같은데 아직도 마음 한편이 불편합니다.

 

'언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큰 열망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속상한 일이지만, 사실 이 상황이 좀 가라앉긴 하더라도 2020년 전의 그 일상으로 돌아가긴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제 저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예전의 그 평범한 일상의 기억을 흘려보내려 합니다. 망각의 파도 위에 얹어 놓으면 자연스럽게 제게로 다가왔다, 멀어졌다 하면서 흘러가겠지요.

그리고 지금의 있는 자리에서 현실이 요구하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아주 작은 것부터, 이것이 새로운 일상임을 받아들이면서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말하는 “뉴노멀(New Normal)”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1코린 13,11)

 

망각의 시대를 맞이하신 그대여 환영합니다.

혹여 흘려보내야 할 기억들이 있으시다면, 살포시 망각의 파도 위에 얹으세요.

그리고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자리의 삶을 살아갑시다.

하느님께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지현

성심수녀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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