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국의 세상만사 인생사]

우리 매형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북에서 태어나 부모와 떨어져 남쪽으로 내려와 살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비극과 고단함의 시작이어서 명절 때만 되면 눈자위가 수북히 붉어지고 이력서를 만드는 족족 퇴짜 맞기 일쑤인 세월을 살아낸 우리 매형이 마지막에 선택한 직업(?)은 목사님이었다.

신학을 공부하는 매형 뒷바라지를 위해 짙은 베이지색 옷을 입고 우유를 배달하던 누나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한데 교복을 입고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다가 갑자기 시집을 가더니 느닷없이 이상한 유니폼을 입고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누나를 보며, 당시 딱 스무 살이던 나는 까닭모를 분노가 일어 매형 보기를 뭣같이 했던 기억이 있다. 한국판 타임지를 뒷주머니에 꽂고 다니면서 말끝마다 되도 않는 영어를 섞어대는 품새나 스스로 앞가림도 못해 마누라 우유 배달이나 시키면서 걸핏하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둥,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니 조만간 좋은 일이 있다는 둥 하면서 뭔가를 훈육하려 드는 서툰 윗사람 행세를 볼 때면 참지 못하고 화를 벌컥 내곤 했는데 매형은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처남의 가시 돋은 말을 저만치 피하곤 했다.

허나 지금 돌이켜보건대 매형은 그야말로 자기 말대로 ‘착하게’ 살았고 ‘젊어 고생’을 죽도록 했으며 여전히 틈만 나면 삽으로 땅을 고르고, 뭔가를 심어 가꾸고, 환갑이 지난 나이에도 틈을 내어 처갓집 보일러를 손보고 담장을 고치곤 한다. 이번 추석 때에도 여전히 그 되지도 않는 영어를 섞어 쓰면서 처갓집에 와 하수도를 손질하는 매형을 보며 별 것 아닌 삶이 주어졌건만 그것을 그렇게 성실하게 살아내는 그에게 참으로 생소한 경외심을 느꼈다.

그런 매형이 영화 ‘디워’에 대한 생각을 내게 얘기한 것이다.

“야. 작은 처남아. 고조 연출하고 감독하는 인간들은 다 그런 고이야? 야. 심형래가 고생고생해서 영화를 만들었어. 길티? 길구 고거이 히트를 했다 이고이야. 고조 심형래가 얼마나 많이 실패를 봔? 기러믄 말이야 동냥은 못할망정 자루는 찢지 말아야 할 거이 아니가? 안기러니? 고거 히트 치니끼니 배가 아파 기런거이가? 와 기렇게 심형래를 씹는 거이야. 엉?”

대학로에서 연출 몇 번 했다고 거들먹거리는 놈이 그 위대한(?) ‘디워’를 안 본 것에 대한 우리 매형의 준엄한 일갈이었다. 나는 아는 대로 그 영화의 영화적 한계와, 다소 과해보이는 영화 홍보, 그리고 영화 자체와 심형래의 고생은 별개라는 사실 등을 얘기했으나 우리 매형은 이미 평소의 매형이 아니었다. 식구 중에 내 얘기를 많이 믿으시고 따라서 무슨 일이 있으면 무려 18살이나 어린 내게 충언을 구하곤 했던 매형이 이번에는 계속 “너도 똑같은 놈이야”라는 말만 하시는 것이었다. 난감했다. 이를 어쩌나. 무엇보다도 나로서는 별 관심도 없던 ‘디워’ 때문에 매형이 나를 미워하시는 것 같아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매형과 계속 얘기를 하다가 깨달았다. 평소 영화보다는 다큐멘타리를 즐기시고 그 중에 특히 자연 다큐를 좋아하시는 매형이 ‘디워’ 때문에 그렇게 흥분하시는 이유는 바로 ‘고생한 심형래’였다. 근래에 들어 갑자기 이런저런 오락프로에 나와 자신이 그 영화를 만들게 된 과정이나 자신의 실패담을 호소력 있게 얘기하는 심감독을 보면서 도시에 사는 사람들 중 일부는 그것이 영화 홍보의 일환이라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었겠으나 우리 매형에게는 바로 그 ‘고생’이라는 코드 때문에 모든 것이 진실로 다가온 것이다. 매형이 보기에 그 얼마나 위대한 반전이며 눈물겨운 자수성가인가? 아마 매형은 ‘심감독’의 여정에서 38선을 넘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모습을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치 국가 대표를 응원하듯 ‘디워’를 응원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테고 그 영화의 그래픽이 볼만해서 흐뭇해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뭔 얘기를 더하랴. 매형의 심금을 울린 그 영화를 봐야겠는데 아직 못보고 있다.

무엇보다도 얼마 전 작지 않은 수술을 하신 우리 매형이 건강했으면 좋겠다.

/변영국 2007-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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