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가톨릭평론> 2020년 9-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올해 초, 예기치 못한 코로나의 습격은 우리의 삶을 폭풍우(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지난 3월 27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하신 장엄 기도 강론 중에, 이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마르코 복음 4장에 나오는 풍랑 속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 빗대어 말씀하셨다) 속으로 몰아넣었다. 사스 때도 그랬고, 메르스 때도 그랬으니까, 곧 나아지리라는 믿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순진한 착각이 되어버렸다. 점점 퍼져나간 바이러스는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고, 우리의 삶은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제는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접고 코로나와 함께 살아갈 궁리를 더 많이 한다.

코로나로 인해 경제활동과 소비심리가 위축되면서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이 무너지고 민생이 위기에 처하자, 정부가 모든 국민에게 ‘긴급재난지원금’이라는 명목의 돈을 주기로 했다. 거주 지역, 소득 수준, 가족 관계, 나이 등에 따라 액수의 차이는 있었으나 어쨌든 모든 국민이 나라가 주는 돈을 받게 된 것이다. 재난지원금 지급이 결정되기 전까지는, 이렇게 돈을 퍼주면 나라 곳간이 다 비는 것 아니냐는 둥, 그래도 당장 어려운 이들을 위해 돈을 주는 게 옳다는 둥 왈가왈부하던 이들도, 막상 손에 돈을 받아드니 기분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뜻밖의 결정

재난지원금 이야기가 처음 나올 때만 해도, 수도자인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여겼다. 당연히 수도회가 일괄 수령해 함께 쓰게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동체는 뜻밖의 결정을 했다. 재난지원금을 회원 각자가 받아서 성찰하고 식별해 알맞게 사용하라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 ‘같이’ 하는 것에 익숙해 있던 수녀들은, 갑자기 주어진 ‘큰돈’과 ‘결정권’에 적잖이 당황했다.

‘재난지원금’의 취지에 대한 설명과 각자 잘 식별해 복음적으로 사용하기 바란다는 총원장 수녀님의 메시지가 담긴 영상물을 받았고, 이웃돕기의 창구가 될 수 있는 기관 또는 개인의 연락처 공유가 이루어졌다. 혹시 분원별로 함께 돈을 사용하고 싶으면, 그것도 분원 구성원들이 모여서 의논하고 결정하라고 했다. 이외에는 그 어떤 지침도 없었다. 내가 이해한 유일한 지침은, ‘복음적 가치’와 ‘창조적 사랑’이었다. 복음적 가치에 맞게, 각 개인이 처한 상황에서, 각자가 예수님과 상의해 잘 쓰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국민은 나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사실에 놀라고 신기해했다면, 수녀인 나는 재난지원금을 각자 알아서 사용하라는 수도회의 결정이 놀랍고 신기했다. 수녀들이 모일 때마다 재난지원금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무료 밥집에 식료품을 보내겠다는 수녀, 노량진 취업 준비생들을 돕겠다는 수녀, 북한 이탈주민들을 돕겠다는 수녀, 평소 어렵게 지내는 친척이 있는데 거기에 맛있는 과일과 소고기를 보내겠다는 수녀, 이주노동자를 돕겠다는 수녀, 자기 신발이 낡았는데 마음에 드는 신발을 사야겠다는 수녀, 매번 밥 사준 친구에게 밥을 한 번 사야겠다는 수녀 등 모두 돈을 받기도 전에 돈 쓸 생각에 들떴다. 각자 알아서 돈을 사용하라는 뜻밖의 결정이 우리 안에 활기를 불어넣는 듯했다.

게으름과 귀찮음을 거슬러

처음에는 지원금을 받지 않겠다는 수녀들이 꽤 있었다. 나도 아예 지원금 신청을 하지 말고 국가에 기부하는 게 어떨까 싶었다. 솔직히 지원금을 신청하고 상품권이나 카드를 받아 그 사용을 고민하는 모든 과정이 복잡한 일처럼 다가왔다. 현금으로 받지 않으니 누군가를 도우려면, 내가 직접 물건을 사서 보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었다. 어차피 국가에 귀속되면 그 또한 유용하게 쓰일 텐데, 그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슬며시 올라왔다. 누가 들으면 ‘욕심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은 ‘귀찮은 마음’이 더 컸다. 이는 분명 ‘복음적’이지도 않고, ‘창조적’이지도 않은 태도이며 마음이었다. 또 착한 소비를 통해 지역 경제의 선순환을 만들어낸다는 ‘재난지원금’의 취지에도 부합하지 않는 생각이었다.

기부가 선행(善行)이긴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선행을 하는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매 순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기준으로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분의 가르침을 떠올리고, 그분의 삶과 선택을 되짚으며,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 아닌가.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언뜻 보면 욕심 없어 보이나 더 깊이 들여다보면 게으름과 귀찮음에 더 가까웠던 마음을 ‘거슬러 행동(agere contra)’해 보기로 했다. 일단 돈을 받고, 수녀가 된 이후 처음으로 내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허락된 그 큰돈을 누구를 위해, 어떻게 쓸지 고민해 보기로 했다. 혼자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2020년 긴급재난지원금 페이지. (이미지 출처 = 정부24 행정안전부 홈페이지)

사랑의 감염

동두천에 사는 나이지리아 이주민 데이비드 가족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1년 전 알게 되어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지만, 코로나 이후에는 연락을 못 했다. 당연히 재난지원금을 못 받았을 테고, 코로나로 인해 일자리도 잃었을 게 분명했다. 현금으로 줄 수 있다면 가장 좋으련만, 그럴 수 없으니 물건을 사서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동체 수녀님들이 모였을 때 데이비드 이야기를 했더니, 몇몇 수녀가 자신이 받은 재난지원금 카드를 선뜻 내주었다. 여러 장의 카드가 모이니 액수가 생각보다 커졌다. 데이비드에게 연락했다.

예상대로 일자리를 잃은 지 꽤 오래라 생활이 어렵다고 했다. 건강도 좋지 않아 병원에 다닌다는 이야기도 했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 같은 동네에 나이지리아 이주민 가족이 여럿 산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데이비드에게 여섯 가족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하고, 선물 꾸러미 6개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재난지원금 취지에 맞게 가능하면 동네 시장에서 물건을 사기로 했다. 데이비드에게 필요한 것을 물었으나 매번 “수녀님, 괜찮아요. 무엇이든 도와주시면 감사해요”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주로 빵을 먹는지 밥을 먹는지, 소고기와 돼지고기와 닭고기 중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라면은 먹는지, 가루세제를 쓰는지 고체 비누를 쓰는지, 이렇게 아주 구체적으로 물어야만 겨우 답이 왔다.

시장 안 정육점에 들러 소고기를 사고, 프랜차이즈가 아닌 동네 빵집에 가서 빵도 샀다. 손님이 부쩍 줄어든 것 같은 화장품 가게에 가서 로션도 샀다. 큰 슈퍼가 아니라 작은 가게에서 라면, 통조림, 소시지, 쌀 등을 사고, 또 그 옆집에 가서는 휴지, 세제, 비누, 칫솔, 치약 등을 샀다. 데이비드의 아들인 일곱 살짜리 꼬마가 좋아할 만한 간식거리도 사고, 작은 과일 가게에 가서 과일도 샀다. 장을 보는 내내 데이비드를 비롯한 나이지리아 이주민들에게 무엇이 가장 요긴할지, 무엇이 그들을 기쁘게 할지를 생각했다. 또 우리가 쓰는 돈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가게를 일부러 찾아다녔다. 단순히 돈을 쓰고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마음에 품고 수고하는 과정은 기쁨과 활력을 주었다. 사랑하면 힘이 난다.

그렇게 사 모은 물건과 식료품을 커다란 상자 6개에 나누어 담아 차에 싣고 서울에서 동두천까지 갔다. 직접 선물 꾸러미를 전해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돌아오는 길, 몸은 고단했지만 마음은 행복하고 뿌듯했다. “수녀님, 하느님은 분명 계세요. 오늘 저희 가족은 큰 선물을 받았어요.” 나중에 데이비드가 내게 보낸 메시지다. 우리도 데이비드 가족도 모두 각자의 처지에 따라 고유하게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격려’라는 선물을 받은 듯했다.

수녀들의 재난지원금 사용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천을 사서 이주민에게 줄 마스크를 만들거나, 북한에 보낼 생리대를 만든 수녀들도 있었고, 선풍기를 사서 쪽방촌을 찾은 수녀들도 있었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수녀님 한 분은, 투석 때문에 단백질 섭취가 필요한데도 경제적 사정이 어려워 고기를 사지 못하는 형제님을 위해 재난지원금으로 좋은 소고기를 사서 한 번에 먹을 만큼씩 포장한 후, 형제님이 병원에 오실 때마다 드린다고 했다. 바이러스는 숙주가 있어야만 감염이 된다는데, 재난지원금이라는 숙주를 통해 ‘사랑의 감염’[Gabriella Ceraso, 이재협 옮김, "바이러스가 아닌 사랑에 감염됩시다", <바티칸 뉴스>]이 우리 안에 일어나고 있었다.

‘따로’ 또 ‘같이’

수도자들은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식사하고, 함께 일한다. 돈, 물건, 시간, 공간 등도 공동 소유가 기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나만의 생각, 나만의 소유, 나만의 결정은 없다. 개별적 식별이 필요한 순간도 많지만, 최종적으로는 장상이 결정하고 회원은 그에 순명한다. 물론 어떠한 것을 결정하기까지 회원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수렴하고 기도하는 과정이 있으므로 장상과 회원의 관계가 결코 일방적이거나 수직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며, 수도자의 순명 또한 단순히 수동적인 복종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늘 그렇듯 현실과 이론은 달라서, 장상과 회원의 관계가 수직적이고 일방적으로 흘러버릴 때도 있고, 순명이 복종이나 방관으로 변질될 때도 없지 않다.

이번에 수도회가 내린 ‘뜻밖의 결정’ 덕분에, 나는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성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뭐든 같이 하다 보니, 누군가의 뒤에 숨거나 한 걸음 물러서 있기 쉽다. 공동체가 같이 결정하다 보니, 진지하게 따져 묻고 최선을 다해 살피지 않는 경향도 생긴다. 같이 움직이다 보니, 좀 덜 움직여도 어찌어찌 되어 가는 일이 많다.

사실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 정결 서원을 하고, 더 풍요로워지기 위해 청빈 서원을 하고,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 순명 서원을 했지만, 공동체성이 그 아름다운 서원을 빛바랜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정확히 말하면, 공동체성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성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할 때 그렇게 된다. 사랑에 소극적이고, 나누는 데 인색하고, 책임 있게 선택하고 결정하기보다는 의존적으로 따라가기만 하는 사람이 되어버릴 수 있다.

내가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공동체에 묻어갈 수 있다는 것이 공동체성이 지닌 함정이다. 그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공동체 구성원에게 각자 식별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기회가 더 많아야 한다. 그러면 개인은 보다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행동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공동체 전체의 사명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실패도 하고 시행착오도 겪고, 개인의 욕망과 욕구에 휘둘리는 일도 없지 않겠지만, 그 모든 것이 배움의 과정일 수 있다.

우리는 그저 묻어가고 숨어가기 위해 ‘같이’ 가는 게 아니라, 공동의 사명이 있기에 ‘같이’ 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따로’ 또 ‘같이’의 적절한 균형과 긴장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개인주의도 넘어서고 집단주의도 넘어서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개인은 ‘따로’에 집착해 공동의 사명을 가벼이 여기지 않아야 하고, 공동체는 ‘같이’라는 명분으로 개인의 고유함과 창의성을 소홀히 여기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 유일무이하고 고유한 존재, 즉 ‘따로’인 존재이지만, 같은 신앙을 고백하며 같은 하느님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같이’ 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따로’이면서 ‘같이’여야 하는 이유다.

데이비드네 가족과 함께. (사진 제공 = 이제희)

두려움을 넘어, 울타리 밖으로 나가 창조적으로 사랑하기

변화는 도전인 동시에 기회다. 그래서 우리를 설레게도 하고 두렵게도 한다. 늘 세상은 변화해 왔지만, 코로나로 인한 변화의 폭과 속도는 이전의 변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파르고 빠르다. 더군다나 그 변화가 죽음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감염병’에 의한 것이니, 두려움과 불안은 쉽게 공포로 바뀌고 그 공포는 우리를 마비시킨다.

그런 가운데 종교인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이러한 사회적 시선을 의식해서든, 감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든,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임감 때문이든, 가톨릭교회는 지금까지 방역 수칙을 잘 지켜왔다. 잘한 일이지만, 교회가 방역 수칙만 잘 지켰다고 그 할 바를 다 한 건 분명 아닐 것이다. 두려움 때문에 울타리를 만들고 그 울타리 안에 머물며 자신의 안위를 지키려는 교회는 아니기를 바란다.

교회는 그 본질상 선교하는 교회라고 했다.[“순례하는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교회다”('선교 교령', 2항)] 교회의 본성 자체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열려 있는 존재라는 의미다. ‘우리끼리’의 모임이 아닌 것이다. 모인 목적과 이유를 잃어버릴 때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 ‘창조성’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기존의 틀과 관습으로는 우리의 사명을 수행할 수 없다. 우리를 둘러싼 조건이 변했고 지금도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교회가 공동의 사명을 다시 확인하고 공유하면서도, 개별성과 고유성을 존중하고 그 작은 소리와 움직임에 귀 기울인다면, 바로 거기에서 창조적 에너지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수도 공동체 전체가 재난지원금을 각자 식별해 사용하는 과정에서 나는, 그 창조적 사랑의 힘을 새로이 발견한 듯해 기뻤다.

 

이제희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성서와함께’ 편집부에서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