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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할 수 있는 자[강신숙 수녀] 9월 13일(연중 제24주일) 집회 27,30-28,7; 로마 14,7-9; 마태 18,21-35

용서(容恕)의 사전적 풀이는 “남의 처지를 잘 헤아려 주고, 상대를 ‘나와 같이 보는 마음’”이라 나와 있다. 용서의 용(容)은 ‘얼굴’을 나타내기도 하나 해석에 따라서 비워진 공(空)이나 운동(運動)으로도 쓰인다. ‘서(恕)’는 관용을 의미하는 것으로 남(如:汝)을 나와 같이 보는 마음(心)이며, 남의 처지를 잘 헤아려 준다는 뜻을 지닌다. 모두 ‘용서’의 의미를 깊이 있게 통찰한 어원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용’과 ‘서’는 어떤 사건에 제한을 두고 사용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용서란 소유될 수 없는 대상의 얼굴로서 인간의 인식을 초월하는 무한한 ‘타자’의 얼굴이다. 이때 용서는 닫혀진 자신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너에게로 건너감(動)이며, 동시에 ‘너’가 내게로 넘어오는 행위를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용서는 갇혀 있는 자, 너에게로 넘어갈 자유가 없는 자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오늘 복음의 1만 탈렌트를 빚진 종의 비유는 용서가 신의 얼굴을 드러내는 가장 계시적 영역임을 통찰한다. 그렇다고 용서가 인간의 영역이 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아마도 그랬다면 매정한 종이 처벌받았을 리 없고, ‘주님의 기도’에서 용서를 베풀라는 말이 등장했을 리 없다. 예수는 처음부터 용서를 ’하느님나라‘의 통치 방식에 두고 그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길 원했다. 베드로의 ’용서에 대한 질문‘(마태 18,21)은 그래서 애초부터 잘못된 질문이었다. 용서는 죄의 양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형제에 대한 ’태도‘의 문제였던 것이다. 인간은 수를 세지만 하느님은 그 죄인의 마음을 헤아린다. 그래서 예수는 용서를 셈할 수 없는 영역, 일곱 번씩 일흔 번의 장소로 이동시킨다. 용서는 인간끼리 주고받는 판단의 영역이 아니라 “가엾게 여기는 마음”(27)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숨을 불어넣었다면 그 숨은 ’연민의 마음‘이었을 수 있다. 용서의 어원이 ’얼굴‘을, ’남을 자신처럼 여기는 마음’을 가리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을 닮은 사람이 어찌 신의 얼굴을 못 알아본단 말인가.

신으로부터 빚진 1만 탈렌트를 탕감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빚진 자의 멱살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 용서가 ’공(空)‘에 근거하는 것은 자신이 ’무(無)‘에서 온 자, 아무것도 아닌 자라는 자각이 깔려 있고, 동시에 살면서 받는 모든 것은 무상적 선물임도 안다. 애초에 인간끼리 주고받는 계산에 용서를 설정할 근거가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이 마땅하다. 인간이 받은 대지와 숲과 바다 역시 거저 받았으니, 거기서 나는 것은 무엇이든 자신의 것이라 주장할 수 없고, 거기서 나는 수확을 베풀었다고 해서 감사받을 이유도 없다. 우주와 연결된 생명의 거대한 순환 역시 누구의 것이 아니며, 아무도 그것을 값으로 매겨서는 안 된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며, 사고파는 도구로 전락시켜서도 안 된다. 그것을 가격으로 매기는 날, 그날이 바로 “인간이 죽는 날”(창 2,17)이다. 이것이 에덴동산의 법칙이다. 에덴을 교환가치로 전락시키는 날, 흥정의 대상이 되게 하는 날, 자신이 우주의 주인인 양 행세하는 날, 그날 ’너는 죽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 pikrepo.com)

‘나와 내 가족’의 목숨이 담보된 부채를 탕감받은 종은 다른 사람의 목숨도 그렇게 대했어야 했다. 사람의 목숨은 교환 불가능한 부채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애초부터 그럴 능력이 없었다. 주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엎드려서 “자신이 다 갚겠다”(마태 18,26)며 통사정을 하자 “가엾은 마음이 들어, 부채를 탕감”(27) 해주고 그를 풀어주었다. 그러나 풀려난 종은 돌아가서 같은 처지의 형제를 포박하고 무자비하게 다루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마지막 추장 ‘시애틀’은 1850년경 미국 정부가 아메리카 원주민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강제로 땅을 사려 하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말을 전해 왔다. 하지만 어떻게 땅과 하늘을 사고팔수 있단 말인가? 이 생각은 우리에게 생소하다. 신선한 공기와 물방울이 우리 것이 아닌데 어떻게 그것을 사겠다는 말인가? 이 땅의 모든 것은 우리에게 신성하다. 반짝이는 소나무 잎, 바닷가 모래밭, 짙은 숲속의 안개, 수풀과 지저귀는 곤충들, 모두가 우리 민족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 신성하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땅을 팔면, 이 땅이 신성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공기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공기는 모든 목숨 있는 것들에게 정신을 나눠 준다. 우리는 안다. 땅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을, 모든 사물은 우리 몸을 연결하는 피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의 신은 당신들의 신이기도 하다는 것을, 땅은 신에게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땅을 해치는 것은 땅의 창조주를 경멸하는 것이다.”

추장은 문명(?)의 인간들이 대지를 약탈하고, 동족을 죽이면서 숲과 강을 파괴할 때 이미 다가올 비극을 예감했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말은 사뭇 비장하다: “우리는 당신들의 운명이 어떨지 모르겠다. 들소가 모두 몰살당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숲속의 신비한 구석이 사람들 냄새로 가득하고, 말하는 데 쓰는 전선이 언덕을 덮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제 가장 신의 모습을 닮았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없다. 그들은 떠나면서 21세기를 내다보며, “모든 아이들을 위해 땅을 보존하고 사랑하라”는 말을 남겼다. “신은 하나이며, 사람은 나뉠 수 없고, 그래서 우리는 모두 형제”라며 침략자들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용서는 이런 사람에게나 가당한 말이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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