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숙 수녀] 8월 30일(연중 제22주일) 예레 20,7-9; 로마 12,1-2; 마태 16,21-27

세상에는 악한 사람도 많지만 착한 사람도 많다. 지옥 같은 경쟁에 내몰릴 때는 거침없이 ’헬조선‘이라 욕하던 사람들도 재난의 위기에 서면 달라진다. 그런 때는 여기저기서 답지하는 응원의 물결이 한 편의 서사처럼 극적이고 아름답다. 감동과 희망을 몰고 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서 놀란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 살기도 바빠서, 내 한 몸 건사하기 힘들어서 그렇지 세상은 여전히 살맛 나는 곳임에 틀림없다. 지난 3월 코로나19로 아수라장이 된 대구 뒤에는 죽을 힘을 다해 진료소를 지킨 의료인들과 위험을 무릅쓰고 온정을 펼친 지역들이 있었다. 산불이 덮쳐 마을과 도시들이 화마의 위험에 처했을 때도 그랬고, 수해와 재난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도 그랬다. 그때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온 사방에서 사람들이 달려와 무너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다.

역사의 굽이마다 희망을 지켜낸 사람들이 있다. 엄혹한 독재정권이 무죄한 이들을 고문하고 투옥과 살해를 반복했을 때에도 굴하지 않던 사람들이 있었다. 끊임없이 인간답게 살 권리를 외치고 저항한 사람들 덕에 우리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전쟁지역의 참상을 알리고자 목숨을 건 사진 한 장, 한 줄의 기사로 평화를 일군 기자들이 있고, 난민촌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치료하며 생명을 불어넣는 ’국경 없는 의사들‘이 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헌신한 수많은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가난한 노동자들과 빈민굴 아이들, 성매매로 팔려 가는 어린 여자아이들과 여성들, 핵 없는 세상과 기후위기, 난민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이들이 지치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어디서 온 것일까? 무엇이 이들을 대가 없는 헌신으로 내몰고 있는 걸까?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어떤 힘, 뜨거움, 밀어내는 열정 때문이라 말한다. 그것은 마치 예레미야의 타는 가슴처럼 설명할 길이 없다.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8-9)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는 열정이 ’십자가‘를 지게 한다. ’십자가‘는 단순한 나무형틀이 아니라 움직이는 힘이다. 예수는 '해야만' 하는 의무를 명령한 것이 아니라 할 수밖에 없는 불덩이를 던진 것이다. 그의 길은 단호하며, 타협이 없고, 전부를 거는 모험이 요구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4-26) 그 길은 필사적인 길이다. 제 할 일 다 해놓고 남는 시간에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가는 도정에 마주치는 위험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늑대도 만날 것이고, 저주와 모욕을 퍼붓는 사람들도 만날 것이며, 헛된 짓 하지 말라고 종용하는 가족들도 만날 것이다.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친구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길을 걷게 하는 동력은 예수다. 찬 바닥에 엎드렸던 사람들이 긴 터널을 빠져나와 새벽을 맞이할 때, 그들 얼굴 위로 눈부신 햇살이 번질 때, 비로소 함께 행복해지는 그런 순간이다. 그런 순간이 다시 걸음을 떼게 하고, 예수는 그들의 얼굴로 다시 길을 걷게 한다. 그러니 죽을 것처럼 힘든 그 일이 알고 보면 나를 살린 일이고, 나의 구원이었던 셈이다.

베드로를 꾸짖는 예수. (이미지 출처 = oceansbridge.com)

오늘 복음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예수의 제자로 불리운 길에 전제된 수난이 그러하다. 이 수난이 어디서 온 것인지는 예레미야의 '고백'(예레 20,7-9)에 잘 나타난다. 그는 “폭력과 억압뿐”(8)인 세상을 고발하고 구원의 길을 소리쳐 외쳐 보지만 돌아오는 건 치욕과 비웃음거리라며 고통스러워한다. 그래서 “더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작정하지만 그럴수록 그를 밀어내는 것은 “심장 속에서 타오르는 주님의 말씀”(예레 20,9)이다. 이것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고통이며 불길이다. 예수의 이름을 내세워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목마름에서 온다. 내면으로 치미는 불길이 생략된 신앙은 사사롭다. 나의 신앙도 성소도 사사롭고, 나는 단지 내 가족과 내 교회와 내가 소속된 사회의 안정된 신만 믿게 된다. 그런 신은 인류사 안에서 항상 환영받았던 신들이다. 그 신의 이름이 무엇으로 불리든 간에 제 입맛에 맞는 신들이라서 그렇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느님이라 하고, 실제로 섬기는 것은 잡신이다. 그러니 애써 그리스도교로 입문할 필요가 없다. 차라리 재벌가의 신, 일류 명문대의 신, 돈벼락을 맞게 해 줄 로또의 신, 무병장수의 신들을 섬기면 된다. 굳이 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장구한 역사를 인류와 함께 걸으며, 배제된 사람들 편에 서서 불의와 맞서는 예수를 선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사사롭게 예수를 대하기는 베드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에게 예수의 수난 예고는 천부당만부당한 소리였다. 그가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 라며 극구 만류한 것도 알고 보면 예수를 위해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는 그런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23)는 일격을 가한다. 중세를 무너트린 페스트 창궐로 유럽인 수천만 명이 사라졌다. 인류사 최고의 비극이던 아우슈비츠의 홀로코스트나 오늘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인 팬데믹의 공포는 전 세계를 패닉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런데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교회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때마다 공적인 부르심을 사사로이 취급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그러니 예수의 길을 막아선 베드로의 행위를 어떻게 가벼운 에피소드 정도로 흘려버릴 수 있겠는가? 얼마나 자주 교회는 그런 베드로를 ’인간적 면모‘라고 추켜세우며 관대하게 넘겨 왔는가?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사탄의 길인 줄도 모르고서 말이다. 오늘은 어느 때보다 준엄했던 예수의 질책이 그립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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