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우 신부] 8월 23일(연중 제21주일) 이사 22,19-23; 로마 11,33-36; 마태 16,13-20

날씨가 많이 덥습니다. 더울 땐 무언가 간단한 것을 찾게 되지요. 오늘 글도 조금 간단한 방식으로 진행해 볼까 합니다. 명언 좋아하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명언을 외우고 다니는 정도는 아니지만 삶에 자극이 되는 문구가 있으면 하루 이틀쯤은 되새기며 그 뜻을 생각해 보곤 합니다. 군대에 있을 때 하도 볼 책이 없어서 진중문고에 있는 어느 잡지를 훑어보다가 발견한 한 문구로 오늘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겠습니다. 

이 문구는 방송이나 자기개발서 그리고 자기소개서 잘 쓰는 방법 등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는 명언이라고 하는데요. 유대인이면서 영국의 정치학자이자 작가인 벤저민 디즈레일리(1804-81)가 남긴 말입니다. “자신의 무지함을 인식하는 것이 앎을 향한 큰 진전이다.” 동의하십니까? 한 번쯤은 들어봄직한 말인데, 사실 이 말의 기원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 소크라테스(BC 470-BC 399)가 한 이야기입니다. "무지를 아는 것이 곧 앎의 시작이다." 소크타테스의 "변명"에 나오는 구절이지요.

소크라테스가 한 말 중 그가 죽기 전에 했다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사망 당시에 유언을 남기라는 말에 "죽으라고 하면 죽겠다. 이 더러운 세상"이라는 아주 인간적인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일본의 한 법학자가 법에 대한 책을 쓰다가 소크라테스의 예화를 들면서 소크라테스 같은 위대한 인물이 독배를 든 건 악법도 법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자신만의 부연 설명을 단 것이 와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봐도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이 말을 했느냐 안 했느냐에 대한 논쟁은 여전하지만 오히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소크라테스의 사상에 더 가까운 말일 수 있겠습니다. 앞의 ‘무지를 아는 것이 곧 앎의 시작이다’라는 말처럼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거기에서 새로운 진리를 찾으라는 것이 ‘너 자신을 알라’의 의미입니다. 단순히 '너 자신의 분수를 알아라'라는 수준의 말이 아닌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그렇다면 아는 것은 어떻습니까? 무언가를 알아가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선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쏟아야 하고 때로는 물질적인 것들이 요구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알아가기 위해서는 그 깊이가 더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알아갈 때는 상호관계라는 측면도 고려해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 무엇을 알아갈 때 우리는 많은 것을 투자하고 그것이 헛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곤 합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 신앙인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알아가는 것에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다"고 이야기합니다.(로미 11,33) 그리고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라고 이야기합니다. 누구보다도 하느님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바오로였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그 모든 것을 알기는 불가능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 하느님을 알아가기 위해 나는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은총은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각자의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앞의 이야기와 연관시키자면, 신앙인들에게 지혜란 바로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별하는 것에서 출발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몬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시각대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생각했다면, 인간적인 관점으로 주님을 바라보았다면 이런 고백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모름을 인정하고 주님께 다가섰기 때문에 이런 아름다운 고백이 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대답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나의 모름과 부족을 인정하고 그 빈 공간에 주님의 사랑이 채워질 수 있는 그런 한 주가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부산교구 감물생태학습관 부관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