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함제도 신부 구술사 "선교사의 여행" 펴내

함제도 신부는 청주교구 묘역에 자리를 마련해뒀다며, “뚱뚱하니 두 자리를 달라고 청할까한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정현진 기자

“한국에서 6개월이나 있을 수 있을까 싶었어요. 그런데 60년이 됐네요.”

메리놀 외방전교회 함제도(미국명 제라드 해먼드) 신부. 1960년 사제품을 받고 그해 8월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된 함 신부는 지난 6월 서품 60주년을 맞았고, 8월 15일은 88번째 생일이다.

한국에 도착한 뒤 1961년부터 당시 청주교구장 제임스 파르디 주교 비서를 시작으로 청주교구 북문로본당, 수동본당, 괴산본당 주임과 총대리, 성심고아원장, 청주성심맹인학교장 등을 거치며 약 30년간 청주교구에서 사목했으며, 1998년부터 북한 결핵 환자를 위한 인도적 지원을 시작해 지난해 3월까지 60여 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는 이런 함제도 신부의 60년 여정을 담은 책을 출간했다. 책 “선교사의 여행”은 함 신부의 구술을 정리한 것으로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의 ‘한반도 평화를 위한 가톨릭 구술사 채록 2019 프로젝트’의 하나다.

8월 12일 함 신부가 살고 있는 서울 대방동 메리놀회에서 책 출간을 기념한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함 신부는 지난 시간과 현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국에 온 뒤에 선교가 로맨스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교사가 되려면 세상과 사랑에 빠져야 합니다.”

선교 사제로 첫 발걸음을 시작한 1960년 즈음은 선교사들이 주로 중국에 파송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함 신부는 희망 선교지 1순위로 ‘한국’을 원했다. 고 장익 주교의 영향이었다. 1951년 메리놀 소신학교(고등학교 과정)에서 만난 평생 친구이며 형제였던 고 장익 주교는 함제도 신부에게 한국으로 가자는 말을 여러 번 했고 이것이 선교지를 선택하는 절대 기준이 됐다.

“처음 와서 본 것은 피난민들의 모습이었어요. 전쟁 직후였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죠. 하지만 다 가난했기 때문에 빈부의 격차는 없었고 오히려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 돕고 나누려는 공동체 의식이 있었어요.”

일본을 거쳐 3주간 배를 타고 도착한 부산에서 그가 가장 처음 본 것은 전쟁 직후의 폐허와 피란민들이었다. 스스로 그 모습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직감했고 “압도당했다”고 말하는 그는 처음 “사람들과 함께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도 의사소통조차 쉽지 않은 현실에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고 고백한다.

“청주교구 수동본당에 있을 때였어요. 가정방문 하는데 시골로 가면 사제관이 멀어 신자들 집에서 밥을 먹어야 했어요. 그러면 신자들끼리 미리 어느 집에서 식사할지 정해놓고 먼저 방문한 집의 교인들이 함께 다음 집으로 가요. 숫자가 점점 많아지죠. 가정방문 날이 마치 동네잔치처럼 떠들썩해지던 시절이었어요.... 왜 이런 모습들이 더 그립고 더 또렷하게 떠오르는지 몰라. 그 시절은 전부 다 좋았어요.”

그런 그는 이듬해 청주교구장 비서가 되고, 본당과 보육원 등을 맡으며 그가 그토록 바라던 “함께 하는 삶”을 시작했다. 함 신부는 약 30년의 청주교구에서 신자들과 함께 살았던 시간이 가장 기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가장 오래 사목했던 청주교구가 ‘마음의 고향’이라는 그는 “족보는 없지만 청주 함 씨”라며, 청주에 마지막 몸을 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함 신부의 60년 가운데는 즐거움과 기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일랜드 고유 기질인 감성적 성격을 가졌다는 그는 사람들의 불행과 어려움을 자기 일처럼 힘들어했고, 무력감과 좌절감을 겪었다고 말한다.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가 펴낸 함제도 신부 구술사 “선교사의 여행” (이미지 출처 =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그가 기억하는 힘든 일들 가운데 하나는 부인과 아이 넷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젊은 남성의 장례 미사였다. 자신에게 앞으로 어떻게 사느냐고 울면서 하소연하는 부인을 보며, 그는 정말 절망스러웠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하느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그 외에도 암에 걸려 치료법이 없다는 신자, 아픈데도 약값이 없는 이들, 미사에 왔다가 신발을 잃은 이들.... 이런 끝없는 일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겪어도 겪어도 익숙하지 않은, 늘 새로운 상처로 남았다고 했다.

함 신부는 그런 시절을 거쳐 현재 한국 사회의 모습에 대해, “지금 세대는 전쟁을 겪지도, 전후 상황을 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 시절을 모르고 또 그때와 달라질 수밖에 없고 각박해지는 것 역시 이해한다”면서도, “하지만 내가 겪은 한국인들은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 안에는 공동체 의식, 다른 이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정서적 뿌리가 있다. 그것을 이번 코로나 19로 다시 확인했다”고 말했다.

“나는 매일 기도합니다. 내 마음이 한국인의 마음을 닮게 해 달라고....”

함 신부는 한국이 가장 어려웠던 시절 가장 소중한 것을 발견했다. 그의 선교 모토와 같은 “함께 하고자 함”이다. 언어나 사고방식, 외모는 한국인일 수 없지만 마음만은 한국인들의 그 마음을 닮고 싶어 한다. “아마 70퍼센트나 80퍼센트는 닮지 않았겠느냐?”고 묻는 그는 한국인보다 더 간절히 한반도 평화와 민족의 화해, 남북 간 대화를 위해 매일 하느님께 간구한다.

“나는 보통의 선교사”라고 고백하는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다운 삶, 서로 대화하면서 인간답게 하는 것”이라며, “나도 우리 모두도 부족하기 때문에 혼자 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선교사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와 대화, 서로 오래 가도록 하는 “다리”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특히 북한 선교에 나서는 이유 또한 그런 다리의 역할 때문이라면서 “그 다리 위에 박힌 돌멩이가 되어, 튼튼한 다리가 되어 왕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며 한국 교회가 스스로 그 역할을 할 때까지 충실히 역할을 해나갈 것”이라고 했다.

“북한을 방문하는 일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닙니다. 흔히 우리 인생이 그렇듯 고단하고 실망과 좌절을 겪는 일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북한에서 만나는 정부 관료, 의사, 간호사, 환자들의 미소, 우애, 친절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북한 방문은 여행보다는 피정에 더 가깝습니다.”

1920년대 한국에 들어온 메리놀회가 처음 선교를 시작한 지역은 북한이었다. 전쟁이 나고 남북이 갈라지면서 남한으로 내려와야 했지만 메리놀회는 언제든 북한으로 돌아갈 의지를 놓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함제도 신부에게도 북한은 한국의 선교사로서 돌아가야 할 본향과 같은 곳이었을 테다.

미국인이기 때문에 북한 방문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그는 북한 선교를 시작하면서 북에서는 미국 여권을 가진 원수,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자, 심지어 미국인에게는 배신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북한에 가는 이유는 “정치나 종교를 떠나 그곳에 고통받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라면서, “북한을 처음 찾았을 때, 1960년대의 부산에서 봤던 모습을 봤다. 그때 남한에서 했던 일을 북한에서도 할 뿐이며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신부님은 보수인가요, 진보인가요?”라는 질문에 “나는 가톨릭”이라고 답한 적이 있다고 했다. “가톨릭”의 의미에 대해 묻자 그는 “우리는 천주교인이지만 천주교, 개신교, 불교냐를 떠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양심대로 사는 것”이라고 답했다. 함 신부는 “종교를 넘어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고 가장 무서운 것은 무관심”이라며, “서로 관심을 갖고 일치한다면 한국인이 못 할 일은 없다. 서로 마음을 열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진보와 보수 이전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말했다.

“삶은 기차여행 같습니다. 정차하는 역이 많고 행로가 자주 바뀌고 온갖 사건이 일어나는 그런 여행 말입니다.... 이 여행은 기쁨, 슬픔, 환상, 기대, 만남과 이별로 가득합니다. 기차에서 만난 승객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함께 가게 된다면, 서로 사랑하고 도와준다면, 그건 참 좋은 여행이 될 겁니다.”

함제도 신부는 이제 기차여행과 같은 삶에서 정차역 하나를 또 거치고 다음 역을 향해 간다. 그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스스로 물으면서,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 잘 들어주는 것”이라는 답을 찾았다. 그는 “다른 사람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존중하며 들어줄 수는 있다. 시간이 아주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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