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국의 세상만사 인생사]

안식일에 밀 이삭을 훑어 먹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며 침을 튀겨가며 흥분하던 바리사이들을 바라보는 예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바리사이들 역시 하느님의 자식인지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한마디 하기는 했지만 결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귀가 열려 있지 않은 그들을 보면서 아마 예수는 무척 암담했으리라. 그 암담함은 바리사이들의 꽉 막힌 율법주의에서도 기인했겠지만 그 율법이 그야말로 ‘꽉 막힌’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겨를도 없이 율법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가는 그 시대 자체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의 미덕 중에서 나는 그 분의 ‘혁명적 시비걸기’야 말로 우리에게 절대적인 복음이 될만하다고 믿는다. 물론 그 분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친아들’이며 ‘총각’이고 가장 중요하게는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참으로 엄청난 일이며 우리가 그것을 그대로 믿는다는 것 자체로 우리를 복 받은 사람이 되게 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허나 그것은 분명히 신학적 추론과 신앙적 고백이 첨가된 부분이며 객관적 사실이라고 주장되기 보다는 믿는 이들의 주관적 체험에 근거할 수밖에 없는 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주관적 체험에 근거하여 그 모든 것들을 사실로 믿는다. 허나 지금 얘기하고 싶은 것은 복음서 사가들이 명백히 예수님을 곁에서 시봉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 즉 ‘진리가 당신들을 자유롭게 하리라’ 하는 대목이다.

진리는 곧 말씀이며 예수님의 말씀이야말로 로고스, 즉 말씀인 동시에 절대적 진리라면 그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는 이 이야기야 말로 얼마나 엄청난 복음인가? 예수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따르면 우리가 완전한 자유를 구가하게 된다는 이 기쁜 소식, 이것이야말로 내가, 다소 비과학적일 수도 있는 갖가지 가톨릭의 교의들을 가감 없이 믿을 수 있는 근간인 것이다. 허나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활개 치던 삼류 종교인인 바리사이들은 그 말씀이자 진리인 것이 인간을 완벽하게 옭아매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류에 대해 예수는 ‘옭아매는 사슬이 아니라 자유를 구가하라’고 혁명적으로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렇기 때문에 아주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가슴 한 구석이 끄먹한 것은 왜일까? 불안하다. 지금의 이 시대가 그 시대와 너무 닮아 있지 아니한가...

정치며 환경, 외교, 경제... 뭐 이 따위 것들은 내 소관이 아니다. 나는 그저 그렇고 그런 연극을 하는, 그리고 가끔 되도 않는 글이나 쓰는 사람이니 언감생심 그런 것들을 주워섬겨야 웃음거리가 될 뿐이니까..

허나 답답해 죽겠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한 것일까? 왜 수첩에 빼곡하게 스케줄이 들어차야 하고 전철이 오는 소리가 나면 들짐승처럼 뛰어야 하며 왜 난폭하게 운전을 해야 하고 왜 성당의 청년회원이 줄어들면 노심초사해야 하는가 말이다. 왜 시집을 가라고 재촉하고 왜 노총각 보기를 냄새나는 노린재 보듯 하는가 말이다. 부자는 천국에 ‘절대로’ 갈 수 없다고 얘기하는 예수의 면전에서 두 손을 모아 가며 부자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무슨 수작이며, ‘가톨릭이 점점 중산층화 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리는 것은 무슨 곡절인가? 자기를 배반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치는 어처구니없는 동족들 앞에 매달려 처참하고 부끄러운 몰골로 죽게 되는 운명을 흔쾌히 받아들인 예수 앞에서 우리의 사제님들이 너무나 당당하신 것은 아닐까?

돈과 권력, 풍족함과 높은 자리는 정녕 예수님의 것이 아니라고 나는 알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나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할 것이며 바리사이들의 믿음처럼 우리를 옭아 맬 것이 너무도 자명하다. 아 진정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언젠가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다시 오신다면 이천년 전의 모습을 기억해 보건대 분명히 아주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오실 것이다. 제발 덕분에 그 때 그 분을 알아볼 만큼의 시력은 가지고 살자. 그렇게 엄청 자유로운 분을 그리 완벽하게 옭아매어진 시선으로 어찌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변영국 2008-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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