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서울맹학교 녹음실’ 낭독봉사자들

▲국립서울맹학교 녹음실

모라꼿 태풍이 한반도를 스치는 기운 속에 비가 오락가락하는데, 한여름 무더위 속에 습도마저 치솟고 보니 도심은 폭염이 따로 없다. 숨이 턱턱 막히는 한여름의 주말을, 맑고 고운 소리를 내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 일찍 글자를 깨친 세 살 먹은 애들도 눈으로 책을 보는 요즘 세상에 어른들이 소리 내어 책을 읽는단다. 어찌된 일인가?!

서울 삼각지에 자리한 국립서울맹학교는 지금 방학 중이어서 학교가 문을 닫은 상태이다. 그러나 주말이면 학교 녹음실만큼은 문을 여는데, 그 까닭은 주말 낭독봉사자들을 위해서다. 이곳 녹음실에선 시각장애인들을 위하여 일반 도서를 카세트테이프나 컴퓨터를 이용한 디지털도서로 제작하는데, 바로 이곳에서 귀로 책을 읽을 수 있는 디지털도서를 만드는 데 한 몫 하는 사람들이 낭독봉사자들이다. 기술이 발달하였어도 아직까지는 낭독봉사자들이 소리 내어 읽는 책이 없다면 만들 수 없는 게 바로 소리로 읽는 책인 것이다.

현재 국립서울맹학교 녹음실( 02-3279-5516)에는 50명쯤 되는 낭독봉사자들이 있는데 4명의 남성을 빼고는 모두 여성이다. 그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 녹음실을 찾아 2시간쯤 녹음을 하고 돌아간다. 그 가운데 주로 직장인들인 10명쯤 되는 봉사자들이 토요일에 녹음실을 찾는다.

“이곳에 낭독 봉사하러 오시는 분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2시간쯤 녹음을 하고 가요. 그런데 학교가 격주로 쉬기 때문에 주말 봉사자들은 한 달에 두 번밖에 오시지 못해요. 그런데다 여름 겨울로 방학 때는 학교가 문을 닫으니 봉사자들도 오실 수가 없어요. 그러면 리듬이 깨지거든요. 주말 봉사자들을 위해서 올 여름방학부터는 주말에 녹음실 문을 열기로 했어요.” 녹음실을 담당하는 신성현 씨의 말이다. 그랬더니 오히려 봉사자들이 더 반색을 하더란다. 하루 한날 책을 읽는 것도 흐름을 타는데, 긴 방학을 보내고 나오면 리듬을 찾기가 쉽지 않아 짧지 않은 공백기를 거쳐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던 까닭에서다.

삼각지에 있는 국립서울맹학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이료재활과정과 전문대학에 준하는 전공과가 설치(유치원부터 초·중·고등학교 과정은 서울 신교동에 자리하고 있다.)되어 있는데, 이료재활과정은 2년 과정으로 각 학년 세 반 74명이 다니며, 전공과는 3년 과정으로 각 학년에 한 학급으로 26명이 침술과 안마 등을 배워 재활 자립의 길을 다진다. 연령대는 이십대부터 오십대까지 고루 분포되어 있다. 이들을 위해 다양한 서적을 녹음하는 것이 낭독봉사자들의 몫인데, 그 특성상 해부생리학이라든지 한방서적, 인체 모형에 관한 책들이 많아서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녹록하지가 않단다.

▲(왼쪽) 임지희 씨와 (오른쪽) 봉원란 씨가 낭독봉사를 하면서 경험한 자신들의 경험담을 나누고 있다.

뜨거운 여름더위를 청량한 소리로 식히다

이렇듯 뜨거운 여름을 청량한 목소리로 시원하게 식혀 주는 국립서울맹학교 녹음실을 찾아갔다.
낭독봉사를 하려는 지원자는 테스트를 거친다. 일종의 오디션을 보는데, 오디션을 통과하면 3개월 10회 정도의 연습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연습이 끝나면 녹음에 들어가는데, 봉사자들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책 한 권을 녹음하고 편집과정을 거쳐 오디오북으로 만들기까지는 최소 1년에서 1년6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한 권의 책을 떼고 나면 둘째 권부터는 낭독봉사자들의 녹음은 한결 수월해진다.

“시각장애인들은 소리로 사람을 파악해요. 목소리 톤이 높으면 좀 뚱뚱하겠구나, 이런 식으로요. 밝은 소리를 좋아하지만 누구한테라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죠. 도서와 목소리가 적절해야 하는데, 여기 책들이 해부생리학 인체모형에 관한 것들이라 봉사자들도 이십대 초중반부터 오십대 중반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어요. 제가 여기서 일하지만 봉사자들을 보면서 ‘나도 나이 먹고 정년퇴직하고 나서 할 수 있을까?’ 그러는데, 대답은 ‘글쎄요!’에요.” 하는 이는 녹음실 담당자 신성현 씨다. 그러면서 그이는 낭독봉사자들의 열정과 노력에 감탄을 금치 않는다. “우리 봉사자들은 모두 대단하신 분들이에요. 정말 열심히 열정적으로 참여해 주시거든요. 정말 고마운 마음뿐이죠.”

▲신성현 씨가 봉사자의 녹음 상태를 보며 설명을 하고 있다.

오히려 제가 정화되는 느낌을 받아요!

“봉사라고 해도 되는가 싶어요. 재미있어서 하는 건데….” 하면서 말문을 연 임지희(30세) 씨는 주말이면 영등포에서 삼각지에 있는 맹학교에 출석을 한다. 주말 낭독봉사자 가운데 최고의 베테랑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이는, 2007년 2월에 시작해서 지금까지 주말 출석도장 찍는 일을 거의 거르지 않았단다. 직장생활 5년 동안 휴가도 못 가고 금요일이면 야근으로 파김치가 되어 새벽에야 집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토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이곳 녹음실을 찾았단다.

“너무 피곤해서 ‘감기 걸렸다고 그럴까?’ 그러다가도 아니지 싶어 나와요. 막상 나와서 녹음실 밀폐된 공간에서 정신을 집중해서 책을 읽다 보면 고민이나 복잡한 것 다 잊어버리고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고 정화되는 느낌을 느껴요. 그렇게 녹음을 하고 돌아갈 때는 보람되고 뿌듯한 게 ‘힘들지만 왔구나!’ 그러는 게 스스로에게 보상이 되고 선물이 되더라구요. 이제는 낭독봉사가 오히려 주기적으로 나한테 봉사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 권을 마치고 지금 3분의 2쯤 읽은 새로운 책 <춤추는 뇌>를 이번 여름방학 동안 마치는 게 목표라고. 그러면서 막상 책을 읽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봉사’라는 이름이 붙은 일에 대한 책임감이었다고 털어놓는다. 그러기에 책을 받아들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이 책을 뗄 때까지는 아파서는 안 된다. 이건 양보할 수 없는 일이니까 어떤 핑계도 안 된다.’ 하고. 또박또박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그이의 목소리는, 글쎄 뭐라고 할까, 푸른빛이 감도는 숲 속의 풀벌레 소리가 같다고나 할까.

이제 막 시작해서 연습 중이라는 또 다른 낭독봉사자인 봉원란(44세) 씨의 목소리는 낭랑하다. 사십 초반의 그이를 소리로만 판단하면 귀염성 있는 이십대 초반의 아가씨라고 생각할 것 같다. “사는 게 어느 정도 자리 잡히니까, 글쎄 누군가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런데 제가 체력이 안 되니까 몸으로 하는 건 힘들고 우연히 TV에서 낭독 봉사하는 걸 보게 되었는데, 아 저거면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신청을 했는데 여러 사정 때문에 이제야 시작을 했어요.” 그이는 암으로 두 차례 수술을 받고 회복이 되자 곧장 녹음실을 찾았다.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하고 싶은 일로 봉사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좋다며 목소리만큼이나 맑게 웃는다.

▲부부 낭독봉사자 김형배 씨와 신광숙 씨.

부부 낭독 봉사자의 첫 걸음

그런 주말 낭독봉사자 가운데 김형배(37세) 씨는 아내 신광숙(34세) 씨를 따라 녹음실에 왔다가 봉사를 시작한 경우다. 남성 봉사자가 드물다 보니 그이는 봉사자들 속에서도 소중한 존재이다. 그이들은 이제 결혼 8개월 된 신혼부부다. 아직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는 신혼부부가 주말이면 손을 잡고 녹음실 문을 두드리는데, 사실 남편은 주중에는 바빠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주말만큼은 시간이 나는 대로 서울 당산동 집에서 삼각지에 있는 녹음실에 가는 아내를 바래다주곤 했다. 그러다 보니 2시간쯤 녹음하는 아내를 우두커니 기다리기보다는 “나도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아내한테 말했더니, “그렇게 하라.”며 적극적으로 격려를 해주어 낭독봉사를 하게 되었단다. “이제 두 주째 하고 있는데, 발음이 어눌하고 뭉개지는 게, 발음이 말리기도 해요. 봉사활동이라기보다는 (이런) 습관을 고치는 거라고 생각해요. 본래 전산 쪽 일을 하니까 그런 책이라면 좀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는데, 어떻든 재미있습니다.”

그런 그이의 아내 신광숙 씨는 베테랑 낭독자이다. 기존에 읽던 책을 중지하고 이번에 새로 입고되어 빨리 녹음해야 하는 책을 새로 받아 부지런히 읽고 있는데, 그이의 목소리는 듣기에 무척 상냥하다. 대학 다닐 때 방송반 활동한 게 계기가 되어 낭독봉사를 하게 되었는데,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걸 누군가한테 나눠 주는 게 좋은데 제가 체력이 좋지 않아서 다른 거는 잘 못하겠고…. 누구한테 도움을 주기보다 내가 좋아서 (낭독봉사를) 하는 거고, 하고 나면 나 자신에 대한 뿌듯함을 느껴요. 그러니까 즐겁고 행복해요.” 한다.

그런 그이는 노력형 낭독봉사자이다. “중간에 책을 읽고 온 날이랑 그렇지 못한 날이랑 (녹음하는) 양이 달라지더라구요. 집에서 오는 동안 차 안에서 책을 읽으면서 연습을 해요.” 그런가 하면 어려운 발음은 볼펜을 입에 물고 연습을 하면 도움이 되더라면서, 두 볼 발그레해지며 수줍게 웃는다. “(봉사라기보다는) 주말에 (남편과) 함께 여기 오는 게 하나의 즐거움이고 작은 기쁨이에요.” 하는 아내의 말을 받아, “둘이 함께할 수 있어서 더욱 좋습니다.” 하고 남편이 거든다. 그러더니 아내와 남편이 서로를 바라보면서 환하게 웃는다. 그 모습 보고 있자니 주변 사람들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경기도 광명에서 오는 이춘순 씨가 낭독봉사를 하고 있다.

책을 소리 내어 읽는 일

이날 낭독봉사자들이 서로의 경험에 비춰 들려준 노하우는 이런 것들이었다. 첫째, 너무 배가 고프면 목소리가 떨려 안 되지만, 약간의 공복상태가 소리를 내는 데 좋다. 둘째, 입 모양을 크게 벌려주는 게 발음도 정확하고 소리가 잘 나온다. 셋째, 오기 전에 미리 읽어보는 게 좋다. 자연히 연습시간이 된다. 넷째, 녹음하기 전에 기복을 줄이려고 전날 녹음한 부분을 들으면서 몇 번 같이 따라 읽는다. 다섯째, 듣는 것 위주로 책을 읽는 시각장애인들한테는 조금 속도감을 높이는 게 좋다. 그 밖에 책을 읽다 보면 침을 삼키게 되는데 그럴 때는 마이크에서 고개를 돌린다. 책장을 넘길 때는 뒷부분을 아예 외워서 녹음을 끝내고 책장을 넘긴다. 숨소리는 참는다. 녹음은 짧게 해라, 등등.

재미있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녹음실을 찾은 낭독봉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낭독봉사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충만감과 성취감을 느끼고, 그래서 행복하다고 하였다. 봉사라기보다는 낭독봉사가 재미있으니 책을 읽는 일이 기쁘고, 오히려 자신에 대한 선물이고 작은 기쁨이라고 한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기쁨, 나누는 데 오히려 채워지는 충만감으로 느끼는 뿌듯함.

많아야 나눌 수 있다고, 없어서 나눌 수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한테 그이들은 해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해보세요. 재미있어요. 재미있으니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어요. 나눠 보세요. 내가 먼저 행복해져요.”

그렇게 자신들의 행복담을 들려주던 이들이 한 사람씩 녹음실로 또 각자의 길로 자리를 떴다. 나 역시 선한 의지를 좇아가는 그이들을 뒤로 하고 녹음실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후덥지근한 여름 무더위가 훅하니 끼쳐 온다. 낭독봉사자들한테 전해 받은 청량감을 안고 그 무더위 속으로 들어간다.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