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오디세이아 2]

칠월이면 의례 난 가방 한 개를 달랑 들고 한국에 왔었다. 인사동 찻집에서 대추차를 마시면서 친구들도 만나서,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하면서, 행복을 누렸다. 길에서 떡볶이, 튀김, 김밥도 사 먹고, 남대문시장을 기웃거리며 여름 한철 입을 예쁜 냉장고 바지를 사면서 흡족했으며, 여러 가지 새로운 작업들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꿈꾸면서 행복했었다. 그런데, 고향에서 열심히 배우며 신나던 나의 여름은 사라졌다. 대신 내가 가르치는 대학은 이 코로나 사태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 대해 서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온라인 수업을 원칙으로 하되 약간의 대면 수업을 함께 병행해야 했다. 뉴스는 미국 대학의 절반가량은 문을 닫을 수도 있다고 이미 경고했다. 내가 사는 동네는 비교적 안전한 편이었는데, 하루에 몇 백명씩 확진자가 생겨나고, 여전히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잘 안다고 생각한 미국 사회에 대해 깊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서구의 개인주의는 근대가 시작되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인의 주권을 지키는 것이 절대 주권에 맞서는 방법이었기에, 누구의 기사가 아닌 시민 개인들은 목숨을 걸고 싸워,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획득했다. 그래서인지, 서구인에게 무엇을 하라는 요구는 그들의 존재 자체를 거부당하는 것 같은 거부감을 주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주제의 자유를 전제로 하는 개인주의와 나만 생각하는 자기중심적 이기주의는 그다지 많이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코로나를 이겨낼 자신이 있으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누군가 타인이 코로나에 감염될까 봐 마스크를 쓰는 것이다. 타인이 초대되지 않은 개인주의의 자리는 그저 병적인 자기도취로 보인다.

코로나 팬데믹이 우리를 초대하는 자리는 결국 자기 마음을 찬찬하고 따스한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일. 어느 고즈넉한 저녁, 하얀 물새가 자기를 잊은 채 사색에 잠긴 모습. ©박정은

모든  숨겨진 실체를 드러내는 이 글로벌 시대의 역병 코로나는 우리를 서행하게 하고, 모든 전제를 의심하고 질문하게 한다. 우리가 알고 있던 선진국은 어디이고, 세상의 중심은 어디인가? 나의 자유와 권리를 추구하는 서구의 사고방식은 절대적인 가치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우리가 멈추어 선 이 세상은 우리에게 삶의 진정한 가치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이 지구라는 별 위에 살고 있는 많은 생명은 사실 소중하게 연결되어 있지, 무슨 피라미드처럼 높고 낮은 수직 구조가 아니며, 주변부과 중심으로 구분되지 않았다는 것. 우리는 주어진 시간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 나그네들이라는 것, 그래서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마음 한가운데 모시고 살아가라는 것을 조용히 가르쳐 주는 것 같다. 오직 우리 마음, 그리고 세상 한가운데 중심은 하느님의 자리로 남겨 두라고 일러주는 것 같다.

사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첨단 과학의 발달로, A.I 와 함께 살아갈 날들을 이야기하던 우리에게, 아직도 마음으로는 역병이라는 현상이 낯선 것도 사실이다. 로마의 멸망이나 중세의 흑사병, 그리고 스페인 독감에 대해 공부할 때에도, 설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어느 이야기를 읽어 보거나 역사를 들여다보면, 사실 거의 모든 세대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재해를 통해 고통을 받았고, 또 배고팠다. 물론 지금도 많은 사람은 재해로 인해, 가난으로 인해 자기 고향을 떠나 지구를 떠돌며 고생한다. 그러니 고통은 인간의 실존 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많은 인간은 신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라는 경험은 나의 신앙 여정에  무엇을 가르치는 이정표일지 생각해 볼 시간이 된 것 같다.

5일 동안 열린 홀리네임즈 수녀회 총회. 처음에는 서툴었지만, 할머니 수녀님들까지 모두 익숙해져, 편안하게 소통한 첫 비대면 회의. 화면은 기도시간에 캐나다 수녀님들이 부르는 성가 장면. ©박정은

코로나로 우리 수도회는 줌(Zoom)으로 총회를 하는 중이다. 주로 선생님들 출신인 우리 수녀회의 총회는 일사불란하게 똑바로 앉아서 꽉 짜여진 스케줄을 강행하기로 유명한데, 이번 총회는 사실 많이 허술했다. 먼저 이 모임에는 여러 시간대의 수녀님들이 자기 공간에서 회의를 하는 관계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각자의 환경과 처지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수녀님들은 충실히 눈이 빠져라 컴퓨터를 주시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화상으로 하는 회의는, 각자가 자기의 공간을 통제할 수 있기에, 나에게는 좀 더 명상적이 될 수 있었고, 그래서인지 훨씬 덜 피곤했다. 너무 많은 말이 오가는 순간, 나는 음소거를 하고는 가만히 침묵했다.

사실 줌은 내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전제, 그리고 다른 수녀님들이 내가 보는 것과 똑같은 화면을 보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나에게 삶의 실재를 생각하게 한다. 내가 보는 것을 모두 보리라는 것은 우리의 착각이다. 같은 것을 본다 해도 각자 자신의 시선(gaze)으로 대상을 다르게 본다고 하는 것이 아마 진실에 가까우니까 말이다. 의견을 조율해 가는 과정에서도 직접 대면이 아니므로, 목소리 큰 사람에 의해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는 점도 확연히 보여진다. 그래서 구태의연한 생각이 아닌 좀 창의적인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 십자가를 닮은 패션화(passion flower)가 진 자리에 패션프룻(passion fruit)이 자라기 시작한다. 코로나 펜데믹에 때를 아는 지혜를 청한다. ©박정은

이제는 수도 공동체의 리더들이 한 장소에 머물 이유도 없고, 영어나 스페인어 같은 언어만 사용할 이유도 없어졌다. 소통은 핵심 있는 내용을 가지고 단순하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멋진 문장으로 표현을 하던 시대에서 이제, 분명하고 간소한 표현을 선호하던 시대로 넘어가는 것 같다. 그러려면 분명하게 사고하고, 소박하고 간단하게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 사실 말을 하는 습관은 그 사람이 지닌 영혼의 결을 의미한다. 그러니 매일매일 수련해야 할 과제는 조금 가지고 만족하기, 남에 대해서, 그리고 나에 대해서 조금만 판단하기, 표현도 조금 줄여서 하기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빨리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너무 지친다고 이야기한다. 예전처럼, 이 지구 별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세상 이곳저곳 골목길을 누비고, 광고에 나온 이미지들을 소비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렇게 멈추어 선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지 꼼꼼히 점검해야 한다. 매일매일 내가 사는 동네를 산책하면서, 이름 모를 아름다운 꽃이 떠난 그 자리에 열매가 맺기 시작하는 걸 본다. 시작하는 때가 있으면 마치는 때가 있으니, 코로나 이후에 다시 세상은 또 돌아가겠으나, 어쩌면, 하느님의 사람다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렇게 하기 위해, 아이처럼 궁금해 하고, 노인처럼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돌아가고 싶은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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