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의 <예수전>에서 '페니키아 여인 이야기'에 대한 유감
'예수전'은 신학자들의 평생의 숙원이다. 그간의 예수연구를 총합하는 '예수전'은 한 신학자의 공부정도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셈이다. 그만큼 '예수전'은 드물고 또 어렵기도 하다. 예수의 일생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비신학자들에게는 마치 허락되지 않은 일처럼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전>은 김진호 목사의 평처럼 의미있는 책이다. "신학자도 성직자도 아닌 김규항 선생의 <예수전>은 예수가 더 이상 교회와 소수 성서 연구자들의 독점물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는 소위 성직자와 성서 전문가만의 비밀 영역이던 '역사의 예수'를 훔쳐 내 자기 자신과 대중에게 돌려준다. 그의 빼어난 통찰력과 필력으로."
김규항이 원한 것처럼, 나 또한 김규항의 <예수전>을 통해 "수많은 '나의 예수전'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한다." <예수전>은 출간으로 이미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김규항 자신이 '김규항의 견해'를 전달하기보다 '예수의 견해'를 전달하고 싶다는 기대를 피력한만큼, <예수전>에 대한 비판적 읽기는 꼭 필요하다. 수많은 예수상이 나열되고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예수상들의 충돌을 통해 '예수의 견해'를 더욱 분명하게 만드는 일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예수전>을 완독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전체적인 리뷰는 다시 쓸 예정이다. 다만 <예수전>을 통해 저자가 단언하는 부분이 '나의 견해'와 완전히 상충되는 부분이 있어 '우선' 지적하고자 한다.
막연히 예수를 만인을 사랑하라 가르치다 박해를 받은 이로 여기고 성경을 읽다보면 중간중간 턱하고 걸리는 때가 많다. <마르코복음> 7장의 페니키아 여인 이야기는 그러한 부분 중의 하나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마태 15,21-28)"
김규항은 <예수전>에서 이를 "익살스러운 교훈극"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수의 예수답지 않은 행동은 실은 진의가 아니라 지켜보는 제자들과 주위 사람들(남성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훈극'인 것이다. 여전히 가부장적 권위의식과 배타적인 선민의식을 버리지 못한 그들은 이방인 여성의 행동에 속이 부글부글 끓지만 예수 앞이라 눌러 참는다. 예수는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그리고 뱃속에서부터 길러져 돌처럼 단단해진 그들의 닫힌 마음을 열어젖힐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짐짓 그들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 본다. 그리고 그 여성에게서 기다렸던 반응이 나오자 내심 무릎을 치며 항복하는 것이다. 예수는 망신을 당하고도 흐뭇해하지만 그제야 예수의 '익살스러운 교훈극'을 알아차힌 제자들과 주위 사람들은 얼굴이 화끈거린다."
김규항의 단언과는 달리, 이 구절은 '익살스러운 교훈극'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신약학자 요아킴 예레미아스의 소책자 <민족들에 대한 예수의 약속>에 따르면, 예수 당시 유대인들의 묵시사상에서도 이방인은 배제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시기는 "역사상 최고도로 포교적인 시대 상황"이었다. 유대인들에게는, 비록 로마 제국을 유대민족의 국가가 대신한다고 믿은 한계는 있었지만, 마지막에 적절한 처벌이 완수되고 나면 하느님의 통치 속에 이방인도 포함된다는 확신이 있었다. 포교활동에 있어서는 오히려 예수가 더욱 배타적이었다. 예수가 판단하기에, 큰 재난이 임박했으므로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 하느님의 뜻을 처음부터 설명해야 하는 이방인들에 대한 포교활동에 나선다는 것은 일종의 사치였다. 무엇보다 급한 것은 '말귀를 알아들을' 유대인들이 우선 회심하는 것이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마태 25.15)"
물론 이것이 '익살스러운 교훈극'이라는 견해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한다. '페니키아 여인의 믿음' 이야기는 소경이면서 길잡이 노릇하려는(마태 15.14) 제자들과 주위 사람들의 위선을 까발리는 교훈극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상황추측을 끌어와야 한다. 예컨대 <마르코복음> 7장 23절에서 30절까지에서, 예수가 흐뭇해하거나, 제자들과 주위 사람들이 얼굴이 화끈거린다는 이야기는 언급되지 않는다.
김규항은 "예수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태도를 바꾸는 데서 예수의 행동이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 자신의 잘못을 순간적으로 깨달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실제로 나는 이 구절이 '성찰하는 예수'의 인성을 보여준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구절을 이렇게 설명한다면 어떨까?
예수는 소수로부터 시작하는 운동을 실천하고 있었지만 그 대상은 우선적으로 유대인들이었다. 그는 이방인에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큰 재난이 임박한 상황에서 예수는 진심으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페니키아 여인의 말을 통해 무엇인가가 가슴을 '쿵'하고 찧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예상치 못하게, 이방인들에게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구절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왠만하면 끌어오는 추측이 더 적은 편이 해석하는 데에 더 안정적이다. 게다가 <마르코복음>이 유대전쟁 직전에 쓰였다는 것을 감안하여 편집비평의 관점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시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유대교 공동체에서 분리 중인 상황이었다. 이방인 선교에 대한 논쟁이 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시기였을 것이고, 이것이 <마르코 복음>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성찰하는 예수'로 보든, 편집비평으로 보든, 김규항의 '익살스러운 교훈극'보다는 안정된 설명이다. 그의 단언이 영 걸린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