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식의 포토에세이]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 아침 6시 50분부터 7시 30분까지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정문 앞에서 '김진숙 복직 투쟁 선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화, 목요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장영식

 

강화도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으로 왔습니다. 미싱공 생활도 했습니다. 작업 중에 밀려오는 잠을 자지 않기 위해 타이밍을 먹으면서 죽자고 일을 했습니다. 122번 화진여객 버스 안내양도 했습니다. 미싱공보다는 버스 안내양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꿈에 그리던 ‘대기업’이었던 대한조선공사에 최초의 여성 용접공으로 입사했습니다. 조선소에서 배를 만들 때, 용접을 하며 눈알에 용접 불똥을 맞아도 아프다는 소리조차 못하고 일을 했던 공장이었습니다. 깡보리밥에 쥐똥이 나오던 도시락을 공업용수에 말아 먹던 공장이었습니다. 50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있는 조선소에서 화장실도 식당도 없던 절망의 공장이었습니다.(http://www.redian.org/archive/36031 참조)

 

강정에서 온 활동가는 김진숙 지도위원을 보자마자 눈물부터 흘립니다. 오히려 김진숙 지도위원이 활동가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장영식
김진숙 지도위원이 영도조선소 정문 앞에서 출근하는 노동자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장영식

 

그렇게 스물한 살에 입사했던 김진숙의 그 후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노동조합을 했다는 이유로 스물여섯 살에 해고되고, 대공분실에 세 번을 끌려갔다 모진 고문을 당하고, 징역살이 두 번을 갔다 오고, 수배 생활 5년을 하고, 부산 시내 경찰서를 다 다녀보고, 청춘이 그렇게 흘러 지독한 병을 얻고, 예순 살의 해고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었습니다. 내일이면 돌아가리라고 믿었던 시간이 35년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이대로 ‘해고자’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해고자’로 죽을 수는 없다는 마음으로 복직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금속노조 한진지회 동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전국에서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응원하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정문 앞에서 ‘복직 투쟁 선전전’에 함께 참여하고 있습니다. 2011년 ‘희망버스’의 마음으로 연대하고 있습니다.

 

금속노조 한진지회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 투쟁에 연대 온 노동자들이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을 염원하는 피켓을 들고 있습니다. ⓒ장영식
김진숙 지도위원이 복직 투쟁 선전전에 함께한 시민의 손을 잡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장영식

 

언젠가 한진중공업 측에서 매월 200만 원을 지급하겠다고 할 때, “일을 하지도 않고 돈을 받을 수는 없다”라며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그 원칙은 하늘이 두 쪽이 난다고 해도 변함이 없습니다. “단 하루만이라도 조선소로 돌아가 작업복을 입고, 용접을 하고, 끌려 나오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당당히 정문을 나오고 싶다”라는 그이의 소망이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한진중공업 측은 결자해지의 마음으로 김진숙의 절규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생존’이며 ‘변화’이며 ‘성장’입니다. 노동자의 꿈과 함께 하지 않는 ‘생존’은 그들만의 생존이며, 노동자와 함께 하지 않는 ‘변화’는 그들만의 변화이며, 노동자와 함께 하지 않는 ‘성장’은 그들만의 성장이기 때문입니다.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노동자들이 통근버스에 내려 조선소를 향하는 신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너머 '생존'과 '변화'와 '성장'이라는 선전 문구가 뚜렷합니다. ⓒ장영식

장영식(라파엘로)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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