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문화
뇌가 만들어내는 엉터리 행복학[서평]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ㅣ대니얼 길버트ㅣ김영사(2005)
  • 김보일 ( . )
  • 승인 2009.08.11 12:49 | 최종수정 2009.08.11 12:49
  • 댓글 1

거저 되는 달인이나 고수는 없는 법이다

컴퓨터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달인이라면 몰라도, 스무 살의 삶의 달인이란 말은 형용모순이다. 컴퓨터게임이나 브레이크댄스와 같은 분야에서는 스무 살의 달인이 나올 가능성이 있지만 스무 살은 여러모로 달인이나 고수가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달인의 포스와 테크닉은 지긋한 연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무협지에 등장하는 수염이 지긋한 노인이 달인의 전형적인 형상이다. 구레나룻의 노인의 형상이 의미하는 것은 시간의 투자 없이 고수는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무지 하나를 썰어도 맵시 있게 썰려면 인고의 세월이 필요하고, 똥볼도 제대로 차려면 고군분투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축구선수 박지성이나 발레리나 강수지의 발을 본 적이 있는가. 정상인의 발이 아니다. 고사목처럼 뒤틀어진 그네들의 발을 보면 저것도 사람의 발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거저 되는 달인이나 고수는 없는 법이다. 돈으로 살 수도 없고, 권력의 힘을 빌려 쟁취할 수도 없는 것이 달인의 삶이다.

달인의 눈썰미

달인들의 특징은 특유의 눈썰미다. 도자기를 굽는 화로 속의 온도를 특유의 직감으로 정확하게 감지해내고,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밀려오는 제품들 중에서 정확하게 어떤 제품이 불량품인지를 감지해낸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그들의 눈썰미, 귀신의 감각을 빌릴 수만 있다면 우리도 삶에서 불량률을 현저히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옷을 고르듯 삶을 선택할 수는 없다. 가격, 질감, 사이즈, 디자인 등 옷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조건은 많지 않지만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에는 무수한 요인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이번 선택은 참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자부심도 예기치 않은 변수에 부딪혀 참담한 후회의 감정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무예의 달인도 삶에서는 번번이 이성의 칼을 놓치고 깊은 상처를 입을 수 있는 법이다. 우리들은 삶에 존재할 수 있는 무수한 변수들을 섬세하게 고려할 수 있는 기하학적인 정신의 소유자이기보다는 ‘아차’를 연발하는 엄벙덤벙한 정신의 소유자이기 십상이다. 달력에 메모도 해놓고, 잊지 말자고 결심도 해보지만 정신은 늘 헛다리짚기 십상이고, 소소한 분실물들은 늘어만 간다.

당신이라면 어떤 삶을 클릭하겠는가

그래도 이번만은 제대로 된 선택을 해보겠다고 하지만 지구상 최고의 판단시스템을 가졌다는 인간의 인지시스템도 부실하기 짝이 없다. 아래 제시되는 삶 중에서 당신이라면 어떤 삶을 클릭하겠는가. 이번만은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바란다.

첫째, 세계적인 기업인 코닥의 창업자, 조지 이스트만의 이야기다. 그는 혁신적인 경영 철학을 통해 노동시간을 단축시켰고, 장애인 편익, 은퇴 후 연금지급, 생명보험, 이익배분 등을 제공했고, 나중에선 회사주식의 1/3을 종업원들에게 배당했다. 그러나 1932년 3월 14일, 사랑받는 발명가이자 인도주의자였던 이스트만은 책상 위에 짧은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둘째, 아돌프 피셔라는 젊은 독일 이민자다. 그는 대규모 노동자 폭동을 주동했다는 혐의(그는 사실 폭동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노동조합에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다고 벼르던 악덕한 자본가들에 의해 억울한 희생양이 되어버린 그는 저지르지도 않았던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1887년 11월 11일, 교수대에서 외친 마지막 순간의 말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바로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뇌가 거는 속임수

하버드 대학의 대니얼 길버트 교수는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란 책에서 이스트먼과 아돌프 피셔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단순한 행복론에 브레이크를 건다. 인생의 겉모습만 보고 그 속의 행복을 단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직접 살아보지 않고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을 말라는 충고다. 그렇다면 우리의 두뇌는 왜 이스트만의 삶보다 피셔의 삶이 더 행복하다고 판단한 것일까. 대니얼 길버트는 우리의 뇌가 매일, 매시간, 매분 우리에게 속임수를 걸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길버트 교수는 우리가 로또복권 1등에 당첨되면 행복해질 거라는 생각도 이런 속임수 때문이요, 최고급 자동차나 노트북을 사고, 짝사랑했던 그 사람과 결혼에 골인하고, 목표로 하던 대학이나 직장에 당당히 합격하고, 직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초고속으로 승진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도 뇌가 만들어내는 속임수 때문이라고 한다.

길버트 교수는 이런 속임수는 우리의 상상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새 자동차를 사면 매우 행복할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그 상상 속에는 잔소리하는 상사, 돈 빌려 달라는 친구, 십 분에 1백 미터도 전진하지 못하는 퇴근길의 주차 전쟁이 빠져 있는 셈이다. ‘새 자동차’라는 아이템에는 이렇게 많은 세부사항 동반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뇌는 이런 세부사항을 누락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런 세부사항을 섬세하게 고려한다면 새 자동차는 결코 행복을 약속하는 아이템이 될 수는 없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뇌는 어떤 일과 관련된 세부적인 맥락을 고려할 수 있을 만큼 성능이나 기억용량에서 제한이 있기 마련이다.

영화는 영화고 현실은 현실이다

연인과 헤어지면,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충격을 예상하기 쉽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는 알렉스는 자신의 손가락을 피스톨로 날려 버리며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나에게 이별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어.” 비장하기 이를 데 없다. 내 손가락을 잃는 고통쯤은 너를 잃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웅장한 제스처로 연기하고 있는 셈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고통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 사랑이 소중하면 할수록 이별의 고통은 헤아릴 수 없는 고통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고 현실은 현실이다.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손가락을 피스톨로 날려 버리면서까지 컴퓨터의 키보드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삶은 의무사항이지 권장사항이 아님을 명심하자. 물론 이별이 아프기야 하겠지만 그 아픔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현실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이별을 하고서도 밥을 먹고 배설을 하는 것이 어찌 보면 속되게 보일지 모르지만 삶은 드라마 속의 현실과는 다르다. 결국은 잊기 마련이고 살기 마련이다.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의 저자, 길버트 교수는 이를 ‘심리면역체계’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경미한 고통은 참다보면 사라진다. 그러나 커다란 고통은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사라져주지 않는다. 엉겅퀴 풀씨처럼 자꾸만 들러붙으려는 고통을 적극적으로 어떤 구실이나 명분을 붙여서라도 털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령 이런 식이다. “그래, 그 사고는 내가 좀더 주의를 기울였다고 해서 벌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야.”, “물론 그건 나의 실수였어. 하지만 그 실수는 내게 삶에 커다란 교훈을 주었어.” 옹색한 자기합리화처럼 비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런 식의 ‘심리면역체계’ 덕분에 인간은 비극을 넘어 다시 삶 속으로 귀환할 수 있는 것이다.

심리적 면역체계

우리는 아주 나쁜 일, 피하거나 도망칠 수 없는 일은 심리적 면역체계를 발동시켜 그 안에서 긍정적인 면을 본다. 가령 십 리 밖까지 다녀와야 할 심부름을 피할 수 없다면 “그래, 십 리래 봐야 4킬로미터에 불과한데 뭘, 누구는 40킬로미터도 뛰는데 그에 비하면 10분의 1도 못되는 거린데, 운동하는 셈 치고 다녀오지 뭐” 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우리에게 심리적 면역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 앞의 슈퍼에 다녀오는 것은 마음과 몸에 부담이 되지 않는다. 그냥 다녀오면 그만이므로 심리적 면역체계가 작동하지 않는다. 질병에 대항해 몸을 지키는 면역체계처럼, 심리적 면역체계는 불행에 대항해 마음을 보호한다. 문제는 이 같은 뇌의 작용을 우리가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시 이스트먼과 피셔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우리는 대부분 의심의 여지없이 이스트먼으로 사는 것이 피셔로 사는 것보다 즐거울 거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우리의 두 삶의 빈칸을 채워 넣는 데 아주 서툴다는 것이다. 왜? 경험을 못했기 때문이다. 두 삶을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두 삶의 빈칸을 채워 넣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부자의 삶은 행복하고 가난한 자의 삶을 고달프다는 고정관념에 기댈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고정관념이 뇌가 만들어내는 속임수라는 것이다.

천국보다 낯선

   

짐 자무쉬의 영화 《천국보다 낯선》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에바도 이런 속임수에 빠진다. 미국에만 오면 자신의 꿈이 이뤄질 줄 알고 헝가리에서 건너온 여주인공 에바를 포함한 세 명의 주인공은 미국에서도 선망의 대상이 되는 플로리다를 찾아 가지만 자신들이 상상했던 곳과는 딴판인 현실을 발견한다. ‘아메리칸드림’은 드림이었을 뿐 현실은 아니었다.

할리우드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아메리카의 화려하고 풍요로운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주인공들의 생각도 무조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작 현실은 이미지와는 딴판이었다. 그곳에만 가면 행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정작 도착해보니 현실은 황무지다. 각박하기 이를 데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스트먼으로 사는 것이 피셔로 사는 것보다 즐거울 거라고 예상하지만 이스트먼의 삶 앞에 어떤 말 못할 황무지가 놓여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우리의 뇌가 이스트먼의 삶을 구체적으로 그려보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채워놓아야 한다. 자, 무엇부터 채울까.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부자라는 사실에 근거해 그의 삶의 빈칸들을 물질로부터 채운다. 좋은 가구, 자동차, 호화저택…그러나 이 대목에서 대니얼 길버트 교수는 중요한 진실 하나를 우리에게 일러준다. “더 큰 골칫거리는 뇌가 상상에 첨가하는 내용보다 거기에서 빠뜨리는 내용 때문에 생긴다.”라고.

새 자동차를 샀을 때의 삶을 상상으로 채워 넣을 때 우리는 행복한 드라이브와 피크닉을 첨가하지만 그 차를 얻기 위해서 견뎌야 했던 잔소리하는 상사, 돈 빌려 달라는 친구, 십 분에 백 미터도 전진하지 못하는 퇴근길의 주차 전쟁을 빠뜨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뇌가 범하는 세부사항의 누락이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행복학을 신봉하게 만든다는 것이 길버트 교수가 우리에게 주는 충고다.

행복의 지도 다시 그려야

그렇다면 미래의 행복을 정확히 예측함으로써 합리적이고 지혜롭게 현재를 사는 방법은 없을까? 저자는 그러려면 행복의 지도를 다시 그리고, 당연하게 여겨왔던 행복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한다고 말한다.

톨스토이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지금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라고 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많은 사람이 행복을 미래에서만 찾으려 하기 때문에 그것이 지금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고 했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미래를 위한 준비는 필수다. 그러나 미래에 끌려가는 삶, 현재의 만족을 유예시키기만 하는 삶은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