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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그 참을 수 없는 무거움에 관하여[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기사를 통해 많이 보셨듯이 세계 곳곳에서 ‘B.L.M’이라고 불리는 운동이 한창입니다. 물론 미국의 여러 지역에서는 혼란스러움을 틈 타 약탈과 폭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어 긴장스러운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는 해결책이 없어 보이는 인종 차별에 대해 더 많은 사람이 목소리를 내고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 공동체 수녀님의 권유로 함께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뉴스에서 접한 시위 장면은 사건의 특수 상황과 맞물려 분노에 차서 몰려든 수많은 흑인에게 무장한 경찰들이 최루탄을 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있는 동네는 굉장히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라 이런 모임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몇몇 가게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나무판으로 문을 가려 놓은 곳도 있었습니다.

조금 망설였던 제 걱정들이 무색하게 모임 장소에는 다양한 피부 색깔을 가진 사람들, 잠든 아기를 유모차에 태워 나온 부부, 아빠 목말을 타고 “정의가 없다면 평화도 없다!”고 외치는 어린이들, 주인이 적어 준 구호를 등에 붙이고 함께 걷고 있는 온갖 종류의 강아지들까지. 남녀노소, 인종의 다양함을 넘어 하느님이 지어 주신 모든 피조물이 함께 걷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집 앞에 물과 간식을 두고 행진하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사람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악기를 들고 나와 연주하며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사람들, 모든 사람이 소중해 보였습니다. 이 와중에 우리는 마스크를 쓰고 서로의 사회적 거리를 신경 써야 함이 조금 속상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의 끝이 있을까? 이러다 또 조용히 유야무야 지나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과 함께 ‘무엇이 이 많은 사람을 움직이게 했을까?’라는 새로운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B.L.M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박스로 만든 손팻말을 들고 있다. ©이지현

사실 얼마 전까지, 저는 조금 부끄럽게도 인터넷 상의 여러 플랫폼에 ‘포스트 코로나’를 검색어로 치고 관련된 기사와 영상을 보는 것이 일과 중 하나였습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경제, 교육, 예술, 인간관계까지 인터넷에는 엄청난 내용들이 한가득입니다. 제 안의 불안감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명확한 답을 얻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쌓여 가는 정보로 인해 저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졌습니다. 사실 이 상황에서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저와 같은 경험을 하셨나요?

“COVID-19와 현재 세상의 상태는 우리에게 역사의 이 순간에 주의를 집중하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예수 성심대 축일을 맞아 성심수녀회 총원장 수녀님께서 보내 주신 편지는 제게 포스트 코로나가 아닌 지금 현실을 다시 한번 바라보게 해 주었습니다.

“.... 침묵 중에 우리 자신과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심장박동을 듣는 것.... 아마도 우리 자신에게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 무엇인가?’에 대해 좀 더 명확하게 물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우리의 계획이 무엇인가?’와는 다른 질문입니다.”(성심수녀회 총원장 바바라 도슨 수녀님의 “예수 성심 대축일” 축일 편지에서.)

우리는 지금 자의도 타의도 아닌, 아니 어쩌면 의도치 않았지만 우리가 만들어 낸 당황스러운 재난 상황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랬듯, 우리를 위한 우리의 계획을 끊임없이 찾고, 쏟아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거센 바람 앞의 촛불처럼, 자연이란 거대한 힘에 순식간에 꺼져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B.L.M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박스로 만든 손팻말을 들고 있다. ©이지현

택배 박스, 피자 박스를 찢어 각자 개성 있게 만들어 온 피켓들 중에 유독 “침묵”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습니다.

사실 제게 있어서 침묵은 종종 ‘비겁함’으로, 많은 경우에는 ‘안전을 위한 방어 기제’로 사용되었습니다. 아! 긴 피정 중의 침묵은 어떻게요.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정말 어떤 때는 그 무겁고 어두운 그 침묵이 해결 못할 숙제로 다가올 때도 많습니다.   

총원장 수녀님 편지 중 “침묵 중에 우리 자신과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심장 박동을 듣는 것.” 이 말은 어디에서 하느님이 아파하시고 어디에서 하느님이 함께 웃고 울고 계시는지 그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이 당황스러운 재난 상황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침묵의 시간은 이를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사를 통해 글로 읽고, 영상을 통해 눈으로만 보아 고통을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어디에 계실지, 어떻게 말씀하실지 더 가까이 듣고 마음으로 반응하기를, 행동으로 함께하기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아마도 제가 길에서 만났던 다양한 인종의 남녀노소 사람들은 하느님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따라 움직인 사람들인가 봅니다.

그동안 저는 아무 데도 나갈 수 없고, 만나는 사람들도 한정적인 이 상황의 반강제적 침묵에 “지루함, 답답함, 불안함”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 침묵의 시간을 원래 의도에 맞게 지내보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심장 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를 따라 걷다 보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완벽한 우리의 계획 없이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그러자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열왕기상 19,11-13)

이지현

성심수녀회 수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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