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대학을 말한다-15]

▲ 그동안 나는 박제화된 지식을 대학생들에게 전달했던 것은 아니었는가?(사진/이광수)

봄기운이 완연한 요즈음 대학 캠퍼스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게다가 부지런히 강의실을 옮겨 다니는 대학생들의 유쾌한 움직임들을 보면 필자로서는 그저 젊음이 부러울 뿐이다. 그러나 이런 풍경에 대한 부러움은 대학을 평면적으로 바라본 관찰자의 생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대학이 안고 있는 속사정을 입체적으로 볼 것 같으면 상황은 다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필자는 조심스럽게 자문해 본다. 과거 386세대로 상징되는 대학생들과 오늘날 대학생들의 사고방식에 대한 차이는 무엇일까? 현재 대학생들이 접하는 공부와 정보의 양은 과거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에 자신의 전공 분야는 물론 비전공 영역에까지 스펙을 넓히고 있는 요즘 대학생들의 능력 지수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향상되었다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눈에는 오늘날 대학에서 비롯되는 상황이 그렇게 만족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한 마디로 비판정신이 실종되었다. 주된 이유로는 학문을 취업을 위한 도구적 수단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학문을 하는 궁극적 목적을 자기성찰, 자존감,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지혜, 타인의 인격에 대한 존중 등과 같은 덕목을 함양하는 데 있다고 하는 말은 이제는 상투적인 도덕 교과서에서나 들을 법한 이야기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른바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효율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적자생존이라는 늪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만 있을 뿐이다.

물론 여기에는 다양한 구조적 원인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경제적 효용성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신자유주의의 무한 경쟁 구도가 우리 사회 전반 구석구석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비단 학교뿐만 아니라 기업, 사회, 병원, 군대 등과 같은 조직 사회가 적용되는 곳에는 자본의 논리가 모두 적용된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학생들의 학습능력이 결정되고, 그에 따라 대학입시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특목고 혹은 외고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이 보장되는 치졸한 현실을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학문의 진정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문학의 가치는 땅에 떨어지고 인문학자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렇지만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숭고함을 기억하고 싶은 것처럼, 이러한 현실의 벽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은 잃어버린 대학의 비판 정신을 회복하는 데서 되찾을 수 있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큰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대학이 올곧은 비판의 목소리를 낼 때가 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학의 근거와 존립 이유를 주장하는 다음의 글은 오늘날 대학은 물론 대학에 속해 있는 구성원들 모두가 가슴 깊이 새길 대목이라 생각한다.

“지식의 어둠을 축출하려는 노력, 기성의 체계라는 이유만으로 용인되어 있는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마음, 그것이 비판 정신이다. 학문의 역사에서 이미 사실로 굳어져버린 것의 외피를 벗기고 그 내용을 심문하는 것도 바로 이 정신이다. 따라서 비판 정신은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 가운데서 한 몫을 얻으려는 비럭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사회가 이미 마련해두고 있는 이권에 편승하는 기술도 전통이란 이름으로 보장된 가치 체계에 비집고 들어가는 약삭빠른 재주도 아니다. 기존의 것을 통째로 삼키는 것, 역사적인 사실을 진리와 혼돈하는 것, 의의와 근원성을 물어보기도 전에 이롭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무엇인가를 긍정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반비판적인 것이다.” (김열규, <대학의 근거>)

자본의 논리에 따라 필요에 순종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없다. 이는 대학과 대학구성체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는 공공의 선을 추구하려는 실천의 힘이 요구된다. 두툼한 외피 속에서 자란 애벌레가 껍질을 깨고 본연의 생명체로서 탈바꿈하는 것처럼, 이제 우리 대학은 스스로를 감싸고 있는 두꺼운 외피를 벗을 때가 되었다. 실천의 힘은 곧 변화의 원동력이다.

희망의 인문학, 위기 속에서 구원이 자란다

‘위기 속에서 구원이 자란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요즈음 진리의 상아탑으로서 학문을 연구하는 대학이 변하고 있는 고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례가 한 가지 있다. 희망의 인문학이 그것이다. 사회에서 없다는 이유로 냉대를 받아 온 빈곤층, 노숙인, 전과자들에게 문학, 역사, 철학으로 대표되는 인문학을 통해 반성적 사고를 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는 과거 상아탑의 세계에 안주하던 대학이 이제는 거친 마찰이 있는 현실 세계에 인문학을 통해 실천의 힘을 보여 준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희망의 인문학 프로그램은 원래 1995년 미국에서 얼 쇼리스가 뉴욕 로베르트 클레멘트 가족보호 센터 회의실에서 시작된 클레멘트 코스에서 노숙인, 빈민, 죄수 등 31명을 대상으로 정규 대학 수준의 인문학을 가르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희망의 인문학>의 저자이기도 한 얼 쇼리스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들은 성찰적 사고를 통해 가족에서 이웃과 지역 사회로, 나아가 국가로 이어지는 공적인 세계에 참여하는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인문학에 대한 그의 신념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3년 전부터 희망의 인문학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으며, 올해는 서울시가 4개 대학(서울 시립대, 경희대, 동국대, 성공회대학)에 교육을 위탁해 지원의 폭을 넓혔으며 교육을 받는 수강생들도 대폭 증가되었다. 나라마다 풍습과 환경, 규범이 다른 것처럼, 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행하는 희망의 인문학 프로그램은 다른 면모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과정이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다.

희망의 인문학 과정은 참가 수강생들의 자존감을 향상시키고 미래를 긍정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고양시키는 것을 강좌의 목표로 삼았다. 희망의 인문학 과정에 참여하는 필자 역시 이러한 교육 목표를 염두에 두고 수강생들에게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벽을 깰 것을 요구했었다. 이 때 나온 매서운 질문 하나.

“교수님, 인생의 벽을 어떻게 깰 수 있죠?” ……
“인생의 벽은 여러분뿐만 아니라 저에게도 있고 앞으로도 괴물처럼 계속 우리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매번 그러한 벽이 나타날 적마다 과거 체험했던 것들에 대해서는 보듬어 안아 주십시오. 그러면서 ‘다시는 너 같은 벽하고는 놀지 않을거야’ 라고 말하면서 그 벽을 에둘러 가십시오. 익숙한 것과의 결별만이 새로운 삶의 질서를 볼 수 있는 지름길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벽을 깨기 위해 혹은 그것을 깰 때마다 만들어지는 새로운 가치와 삶의 방식은 우리의 사고와 삶이 나아갈 수 있는 경계를 확장한다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정말로 대학의 강의실에서 느끼지 못했던 실천의 힘을 체험한 순간이었다. 강의를 마친 후 스스로에게 자문해보았다. ‘마치 편의점에서 진열되어 있는 삼각 김밥처럼, 그동안 나는 박제화된 지식을 대학생들에게 전달했던 것은 아니었는가?’ 이때 머릿속을 스치는 비트겐슈타인의 경구 한마디. “항상 영민함의 척박한 산정에서 내려와 어리석음의 푸른 계곡으로 들어가라.”

어둠의 자식들을 자본의 논리로 조롱하는 사회는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은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받을 권리가 있다는 공공의 정신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성숙한 민주주의는 비판의 목소리를 겸허하게 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민주주의의 꽃을 활짝 피울 수 있다. 효용성, 계산가능성, 예측가능성이라는 합리화의 덫에 걸린 대학들이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조직과 체제의 이익만을 쫒는 이기적 유전자들의 집합에 도전하고 저항할 수 있는 이른바 상식의 차원에서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는 실천적 힘을 키우는 일이 될 것이다. .

박만엽 (서울시립대)
사진 이광수 (부산외국어대학교 러시아인도통상학부 교수, 인도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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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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