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한상욱]

▲ 사진/한상봉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촌각을 다투며 공권력과 자본과 전쟁을 치루며 생사의 기로에 서 있을 때 나는 한가하게 동네 꼬마들을 데리고 며칠 밤을 지리산에 있었다. 마음의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는 없었지만 당장 내려가 그곳으로 달려갈 용기도 없었다. 그저 속세에서 벌어지는 이 기막힌 상황을 생각하며 산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애써 찾아보려 했을 뿐이었다.

그저 말없이 바다와 같이 넓고 끝없이 펼쳐지는 산맥의 봉우리를 보면서 그래도 희망은 있을 것이라며 답답한 마음을 위로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누구에게나 참 힘들고 삶이 무너져 내릴 때가 있다.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꼭 그런 모습이다.

그때 아무 말 없이 언제든지 너른 품으로 받아주고 함께 있어주는 것만큼 고마운 것은 더 鵑?없다. 산은 항상 변함없이 우뚝 버티고 있으면서 우리를 그렇게 받아 주었다. 늘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서 그늘이 되어주고 바람이 되어주고 별을 보여주며 굳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의 곪은 상처를 다 감싸주었다. 산길 역시 인생길처럼 오르막, 내리막을 굽이굽이 넘어야 하며 누구나 겪는 고통도, 기쁨도 어떤 것 인지를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세상은 죽음 같은 해고를 앞둔 노동자들에게 산과 같은 존재가 없었다.

어느 후배가 쌍용자동차 정문 앞에서 만난 어느 여고생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요란하기 그저 없는 헬기가 머리 위를 뱅뱅 돌아다니며 최루액을 퍼부으며 온갖 폭력이 남무하고 협박을 해대던 방송 소리의 와중에서 가방을 메고 시위대에 나타난 여고생은 눈물을 흘리며 망연히 공장안을 바라보았다. 궁금한 후배가 “왜 여기 있느냐” 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아빠하고 작은 아버지가 저곳에 있어요.” 소녀는 집에서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어서 그곳까지 혼자 온 것이라고 했다. 한 해고 노동자의 어린 딸은 공장안에서 70일을 넘게 지새고 있던 아빠 생각을 하면서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세상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국가와 공권력이, 돈으로만 가치를 여기는 천민자본주의에서, 사람의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는 이런 세상에서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공장안에 남아있는 1000명도 안 되는 사람들에게 퍼부어대는 소위 조중동 부류 언론의 왜곡과 조롱과 협박은 끝이 없었다. 언론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해고자를 둔 아빠의 하루하루를 염려했던 그 여고생의 쓰라린 눈물을 전혀 알 리가 없다.

어떤 사건이든 그것은 그 사회의 수준과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 준다. 쌍용자동차 사태를 바라보며 느껴야 하는 자괴감은 이 나라가 더 이상 노동자를 지켜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노동자도 국민이다. 국민에게 해머를 들고 달려드는 공권력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다.

나치 독재에 저항했던 본회퍼 목사는 죽음을 앞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한 미치광이가 큰 트럭을 몰고 대로를 질주하고 있다. 내가 목사로서 할 일은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나 거두어 장례를 치르는 게 아니라, 그 미치광이를 차에서 끌어 내리고 안전하게 갖다 놓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침묵은 무관심이며 외면이다. 쌍용자동차 사태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의인의 그리운 시절이다.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한상욱(인천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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