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생태론'(‘찬미받으소서’ 4장)

올해 5월 16-24일은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반포 5주년을 맞아 특별히 ''찬미받으소서' 주간'으로 지냅니다. 이에 공동의 집 지구의 생태 회복과 우리의 실질 생활을 돌아보고 변화의 길을 함께 모색하고자 합니다. 매주 목요일 8회 연재를 맡아 주신 조현철 신부에게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환경 위기는 자연의 문제이면서 근원적으로는 성장과 개발, 곧 사람의 문제입니다. 코로나19 감염은 질병의 문제이면서 근본적으로는 성장과 개발, 곧 사람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환경위기와 사회 위기라는 별도의 두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인 동시에 환경적인 하나의 복합적인 위기에 당면한 것입니다.”(‘찬미받으소서’ 139항) 프란치스코 교종이 생태 위기의 근원으로 꼽는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과 “인간 중심주의”도 생태 문제가 우리의 사회, 경제 질서와 깊이 맞물려 있음을 보여줍니다(106-136항 참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생태 문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적 사회적 차원”을 고려해야 한다며 “통합 생태론(integral ecology)”을 제안합니다(137항). “유기체들과 그 유기체가 성장하는 환경의 관계를 연구”하는 생태론에 ‘통합’은 필요 없는 말일 수 있습니다(138항). ‘생태’의 어원인 희랍어 ‘오이코스(οἴκος)’는 ‘집’을 뜻하고, 인간과 자연은 동일한 하나의 집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나친 인간 중심주의로 인간과 자연은 ‘통합’이라는 말이 필요할 정도로 분리된 것이 현실입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우주물리학과 진화생물학 등의 자연과학은 모든 것이 존재와 생명 차원의 근원적 유대로 엮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세계상을 보여 줍니다. 세상을 생명과 비생명, 식물과 동물, 인간과 자연으로 분리해서 보기 쉽지만,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이러스만 ‘숙주’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존재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모든 생명은 공생하거나 기생합니다. 나 홀로 ‘자족’은 없으며, 모든 개별 존재는 ‘상호 존재’입니다. 하나의 ‘나무’나 ‘물고기’는 관념일 뿐, 현실에서 나무와 물고기는 땅과 물과 연결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연결이 없으면 생명도 없습니다. 땅과 물은 개별 생명체의 어머니입니다. 동물은 산소를 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뱉고 식물은 이산화탄소를 마시고 산소를 내뱉습니다. 인간도 “자연과 끊임없는 상호 작용”을 합니다(139항). 순환이 없으면 생명도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상관없이 생명의 그물망은 경쟁과 배제가 아니라 협력과 공존의 씨줄과 날줄로 이루어집니다. 진화도 경쟁이 아닌 협력의 원리로 이루어집니다.

종교도 근원적 유대의 세계상을 가리킵니다. 불교의 연기 사상은 우주의 삼라만상이 ‘인연’에 따라 생멸한다고 말합니다. ‘너’가 없으면 ‘나’가 없고, ‘나’가 없으면 ‘너’가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덕분’으로 생겨나고, 살고, 사라집니다. 내 안에는 ‘나’만 뺀 세상의 모든 것이 있습니다. 동학의 삼경 사상(敬天, 敬人, 敬物)은 하늘만이 아니라 사람을, 사람만이 아니라 사람 이외의 존재도 공경하라고 합니다. 이 가르침은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전제합니다. 성경의 창조 질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존엄하며, 인간은 자연과 깊이 연결되어 있고 자연을 존중하고 돌봐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도 만물의 근원적 유대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김수나 기자

통합 생태론은 자연환경을 경제, 사회, 문화, 일상생활의 측면에서 고려하고 공동선과 세대 간 정의의 문제도 함께 거론하며, 공간은 물론 시간까지도 아우릅니다. 우리는 ‘환경’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인간과 질적으로 다르고 분리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사회는 자연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연생태계는 “이산화탄소의 분해, 물의 정화, 질병과 전염병의 통제, 토양의 형성, 배설물의 분해”처럼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일을 수행합니다(140항). 우리가 평소에 의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사회는 인간의 힘만이 아니라 자연에 의해 “미리 주어진 것”을 기반으로 유지됩니다(140항).

오늘날 경제는 자연을 ‘언제나 저기 있는 것’ 정도로 여기고 자연과 무관한 듯 행세합니다. 하지만 “환경 보호는 발전 과정의 핵심 요소”로 경제와 별개일 수 없습니다(141항). 사실 ‘희소한 자원의 관리와 분배의 원리’를 다루는 경제는 근원적으로 자연의 제약을 받습니다. 그리고 지구의 자연은 유한합니다. 자연과 인간은 경제의 기초가 되는 ‘메타 경제’의 두 축이고, 경제는 메타 경제에 기반한 “파생 학문”입니다.(E.F.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경제가 자신의 바탕인 인간을 무시하면 경제는 잔인해집니다. 경제가 자연을 무시하면 경제는 지속 불가능해집니다.

사회 질서와 자연생태계 보전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회 질서가 무너지면 환경 관련 법률과 규정이 있어도 “실제 효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142항). 4대강 사업, 강정 해군 기지,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제도의 미비와 함께 관련 법령의 악의적 해석과 부실한 운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요즘도 큰 변화는 없습니다. 기후 위기의 시대에 강원도 삼척에서는 2기의 석탄화력발전소를 짓고 있습니다. 환경영향평가를 했다고 하지만 건설 현장에서 문화재급으로 추정되는 석회동굴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착수한 이상 매몰 비용이 발생하지 않게 건설을 강행합니다. 제주도는 사회적, 환경적 수용력에서 이미 한계에 이르렀지만, 더 많은 사람의 유입을 부추길 뿐인 제주 제2공항 건설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10만 년의 안전한 보관이 필요한 사용후핵연료의 ‘관리정책 공론화’는 정부 주도의 일방적 짬짜미로 진행됩니다.

문화 다양성은 생물 다양성 못지않게 자연 보전에 중요합니다.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형성된 지역문화는 그 지역을 가장 잘 돌보는 기술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마존 원주민의 생활양식은 그 자체로 아마존을 수천 년간 보살펴온 기술입니다(‘사랑하는 아마존’ 42항). 하지만 오늘날 세계화 경제는 대량 생산과 유통과 소비로 규정되는 소비주의 문화를 세계 전역에 획일적으로 강요하고 이식해 문화적 다양성을 크게 훼손하면서 자연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칩니다(144항).

우리 일상의 삶이 벌어지는 “건물, 동네, 공공장소, 도시”와 “교통수단” 등은 그 자체로서 그리고 우리 행동에 영향을 줌으로써 자연환경에 영향을 줍니다.(150, 153항) 우리의 몸도 통합 생태론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내 몸은 ‘나’에 속하지만 세상과도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몸은 세상의 일부이고, 몸에 대한 태도는 세상에 투사됩니다. 몸을 “하느님의 선물”로 인정하면 세상도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선물로 존중하겠지만, 몸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은 우리의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155항)

지금까지 세상은 ‘성장’과 ‘개발’의 패러다임에서 ‘발전’했습니다. 우리의 경제, 사회, 문화, 일상생활은 성장과 개발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고 형성되었습니다. 성장과 개발은 기계론적 관점에서 인간과 분리된, 철저히 대상화되고 도구화된 자연을 먹이로 진행되어 왔고, 이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들도 희생되고 있습니다. 통합 생태론의 관점에서 생태 문제에 접근한다는 것은 결국 오늘날 ‘종교’의 반열에 오른 이 패러다임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 제기를 뜻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태 문제를 그 뿌리에서 볼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태 문제는 “사회적인 동시에 환경적인 하나의 복합적인 위기”라는 것을 재확인하게 됩니다(139항).

조현철 신부(프란치스코)

예수회, 녹색연합 상임대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관련기사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