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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받으소서' 주간 기획 4] 세계를 '기계'로 보다'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들'('찬미받으소서' 3장)
올해 5월 16-24일은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반포 5주년을 맞아 특별히 ''찬미받으소서' 주간'으로 지냅니다. 이에 공동의 집 지구의 생태 회복과 우리의 실질 생활을 돌아보고 변화의 길을 함께 모색하고자 합니다. 매주 목요일 8회 연재를 맡아 주신 조현철 신부에게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인간의 삶과 활동을 이해하는 특정한 방식이 왜곡되어 현실을 파괴하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빗나가게 되었습니다.”(101항) 

기후변화나 미세먼지가 보여 주듯이, 생태 문제는 인간의 활동으로 생겼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렇게’ 행동한 것은 세상을 ‘그렇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생태 문제는 우리의 세계 이해와 연결됩니다. 오늘날 지배적인 세계 이해 방식은 ‘기계론적’입니다. 17세기, 데카르트를 필두로 세계를 정신과 물질,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으로 분리하고, 자연을 물질적인 운동의 법칙으로 파악하는 ‘기계론적 세계관’이 등장합니다. 근대 자연과학 발달의 토양을 제공한 기계론적 세계관은 자연을 물질로, 거대한 기계로 간주합니다. 생명의 매트릭스인 ‘어머니’ 자연은 기계에 자리를 내어 주고 사라집니다. 기계의 부품에 해당하는 자연의 ‘것’들은 파편화되어 피조물 사이의 근원적 유대가 없어집니다. 부품은 필요에 따라 언제든 바꿀 수 있으니 피조물의 고유성과 본질적 가치도 상실됩니다. 자연을 생명이 아니라 물질로 여기는 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행동 제어장치는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이로써 인간이 자연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근거가 생겼습니다. 객체인 세계는 주체인 인간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무형의 것”이 되었습니다.(106항) 하느님이 ‘보시기’에 참 좋았던 피조물이 인간이 ‘쓰기’에 참 좋은 것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연에서 자신의 필요를 충족해 왔습니다. 하지만 근대 이전까지 자연에 대한 개입은 자연 자체의 “가능성을 존중하며 더불어 존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기계론적 세계관이 자연에 대한 제약을 없애자 사람들은 자연에서 “최대한 모든 것을 뽑아내는 것”에 몰두합니다.(106항) 자연에 무차별적으로 개입합니다.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의 등장입니다. 자연은 언제나 ‘그냥 거기 있는 것’이고, 성장도 언제나 그냥 계속되는 ‘무한 성장’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유한한’ 지구를 ‘무한히’ 쥐어 짜고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뽑아내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쓰고, 더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합니다. 지구가 뜨거워지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습니다. 아니, 멈추는 법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예전에는 길을 자연의 모습을 따라 곡선으로 만들었다면, 요즘은 길을 가능한 직선으로 만듭니다. 길을 가로막는 산과 강은 터널로 뚫고 다리로 가로지릅니다. 자연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힘과 기술을 획득한 인간은 자연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좀 더 빠르게’라는 자신의 필요와 욕구에만 집중합니다. 예전에는 가축이 적당한 공간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생명체로서 자신의 가능성을 누렸지만, 요즘은 몸도 가눌 수 없는 좁은 철창 속에서 짧은 생애를 마칩니다. 사람들은 가장 효율적으로 균질한 ‘고기’를 시장에 공급하여 가장 높은 이윤을 올리는 데 골몰합니다.

파괴되는 자연. (이미지 출처 = Pixabay)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에서 인간의 힘과 생태 문제는 비례합니다. 기술의 발전만큼 “인간의 책임과 가치관과 양심의 발전”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05항) “자연 질서의 착취에서 오는 부정적인 결과”는 무시되기 일쑤고, 기술이 “모든 환경 문제를 해결”한다는 기술만능주의가 횡행합니다. 이윤을 노리고 인간은 자연에 더 깊이 파고듭니다. 공장식 축산과 GMO 작물 재배를 위해 숲을 없앱니다. 숲이 품고 있던 탄소가 풀려나며 기후변화를 부채질합니다. 서식처를 빼앗긴 야생동물과 거기에 기생하는 바이러스는 인간에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자연생태계를 훼손하여 바이러스 감염의 가능성을 키우면서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목을 매는 어리석은 짓을 반복합니다. 두 가지 모두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윤만 보장되면 “인간에게 미치는 잠재적 악영향”은 무시된 채 새로운 기술이 쉽게 사회로 들어옵니다.(109항) ‘가습기살균제’ 사건은 우리가 무시했던 “잠재적 악영향”이 어떤 사회적 재난을 가져오는지 보여 줍니다. GMO 작물 재배와 식품 가공이 언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직, 절망은 이릅니다.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입니다. ‘기술결정론’에 우리의 미래를 맡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기술을 제한하고 그 방향을 바꾸어 .... 온전한 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112항) 그렇게 하려면 지금의 끝없는 질주에서 벗어나고 끝없이 쏟아지는 새로운 상품의 늪에서 빠져나와 “삶의 깊이”를 되찾아야 합니다.(113항) “잃어버린 가치와 중요한 목표들”을 되찾기 위해 “속도를 줄여서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114항) “윤리를 배제한 기술은 자기 힘을 스스로 통제하기” 힘듭니다.(136항)

기계론적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지나친 인간중심주의”를 낳습니다.(116항) 여기에 기술의 ‘힘’이 더해지면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의 토양이 마련됩니다. 물질과 기계로 간주하는 자연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고 인간을 위한 ‘것’이 됩니다. 본질적 가치는 희미해지고 도구적 가치만 두드러집니다. 인간의 자연 탐구는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할 힘을 얻기 위한 수단입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인간의 “지배”와 “다스림”(창세 1,28)은 자연을 마음대로 다루는 인간의 활동을 정당화하는 데 동원되었습니다. 자연은 “두들겨 패서 유용한 형태로 만들어야 하는 원자재”가 되었습니다.(115항) 자연에 대한 인간중심주의는 자연을 상대화할 뿐 아니라 결국 ‘나’를 제외한 타인도 상대화합니다. 돈만 된다면, 아동 성착취와 노인 학대나 유기 같은 비윤리적 행위도 서슴없이 일어납니다.(123항) “인간을 사용하다가 그냥 버리는 소모품”처럼 여깁니다.('복음의 기쁨' 53항) 모든 것을 내가 쓰고 버리는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인간을 여러 생물종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는 '생물중심주의'(biocentrism)는 인간중심주의의 대안이 아닙니다. “오늘날 생태적 위기가 근대성의 윤리적, 문화적, 영적 위기”를 뜻한다면, 인간성의 무시나 경시가 아니라 인간성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올바른 인간학 없이는 생태론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본성은 하느님과의 관계,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회복됩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119항)

노동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 회복을 도와줍니다. 자연을 ‘일구고 돌보는’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실현합니다.(창세 2,15; 1,26-28) 프란치스코 성인의 “피조물에 대한 관상적 찬미”와 함께 베네딕토 성인이 공동생활에 도입한 “영적 의미를 담은 육체 노동”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노동의 고유한 역할을 보여 줍니다.(126항) 노동은 기술로 대체할 수 없고,(128항)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아직 모호할 뿐인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온다고 해도 노동은 여전히 인간의 징표로 남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과제이자 소명인 노동은 우리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소중한 길입니다. 이 길에서 기술관료적 패러다임과 인간중심주의가 발붙일 자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노동’으로 하느님의 모상이 되고,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하나의 창조공동체, 공동의 집을 가꾸며 살아갑니다. 

조현철 신부(프란치스코)

예수회, 녹색연합 상임대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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