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시기상조]

코로나19 정국이 가라앉을 듯 가라앉을 듯 가라앉지 않고 있습니다. 날도 따뜻해지니 마스크가 슬슬 덥고 답답해지기 시작해지는데다 ‘사회적 거리 두기’도 완화되니 카페, 공원 등지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불과 얼마 전, 걱정하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클럽’에서 확진자가 나왔고, 클럽의 특성상 확진자가 속출했습니다. 한 자리수로 내려갔던 확진자수가 늘어났고, 다시 2월의 상황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사회적 염려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언론 보도들이 무시한 행간과 맥락들

그런데 여기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해당 클럽이 남성 동성애자 전용 클럽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클럽과 슈퍼 전파자의 서사가 아니라, 그 관계를 퀴어링(queering, 성소수자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기)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퀴어 문화는 필연적으로 비-퀴어의 문화와 다르게 조심스럽고 비밀스러울 수밖에 없어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유감스럽게도, 한국 사회는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에게 안전한 사회가 전혀 아닙니다. 보수 언론들이나, (평소에도 성소수자들에게 적대적이기로 유명한) <국민일보>를 비롯한 개신교 기반 언론들은 그때 클럽을 돌아다닌 전파자의 동선에 대해 질병관리본부가 밝힌, 즉 필요한 것 이상의 보도를 하거나, 섹스 컬처를 비롯해 게이들이 공유하는 내집단적 문화들에 대해서도 포르노그래피라고 해야 마땅한 보도들을 쏟아내었습니다. 즉, 보도 준칙을 어기고, 성소수자들을 이 사회의 구성원이 아닌,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의 기본적 삶의 태도조차 지키지 않는, ‘무책임’하고 ‘음란’한 존재로 프레이밍한 것입니다.

물론 바이러스 전파자 및 확진자들과 같은 공간에 있은 뒤, 방역 당국을 피해 잠적한 것을 잘 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에서 집단면역 형성 체제로 조금씩 전환하고 있던 방역체계에 커다란 구멍이 뚫릴 수도 있었고, 해당 클럽들을 비롯해 사회적 거리 두기 수준을 넘어 락다운(lockdown, 강력한 사회적 ‘잠금’ 조치)이 필요해질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남성-동성애자를 넘어서 폭넓게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위기에 빠트릴 수도 있었습니다. 한국 사회는 앞서 이야기했듯 성소수자들에게 친화적이지 않고, 공격성을 숨기는 ‘척’하는 이들이 사방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눈에는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 모두가 ‘비정상’으로 보일 테니까요.

모든 행동에는 그 맥락이 존재하는 법입니다. 그들의 행동이 마냥 옳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 1309명의 행간에 존재하는 맥락들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클럽이 게이 클럽이 아니고, 전파자로 지목된 당사자도 이성애자였다면, 과연 이렇게 이슈가 되었을까요? 물론 이슈가 되긴 했을 것입니다. 그런 클럽들이야말로 정말 시한폭탄이고, 언제 어느 클럽에서 슈퍼 전파자가 나올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언론이 보도하는 것처럼 어떤 클럽에 몇 시에 가서 얼마 동안 있었고, 또 어디로 가서 얼마나 있었고, 그 사람은 누구고 그 사람의 성적 지향은 어떻게 되고 하는 것들은 이번 경우처럼 대서특필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사회적 일탈’이나 ‘병리적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존재가 아닐 테니까요.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태원에는 게이 클럽만 있지 않습니다만,(사실 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성애자 클럽은 게이 클럽만큼 이슈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곁가지’처럼 보도되곤 했지요. 사실 위험성이 더 큰 곳은 지금도 문을 열고 있는 이성애자 클럽들일 텐데 말입니다.

이태원 버스정류장.(2014) (이미지 출처 = Flickr)

논쟁은 이성애-이원 젠더 구조를 언급하지 않는다

퀴어-페미니즘 학자 루인은 이른바 ‘2014년 제주 지검장 음란행위 사건’을 둘러싼 논쟁을 두고 “이성애의 불안이 아니라 개인의 불안이 되고, 많은 이성애 실천 중 하나, 이성애 구조의 속성이 아니라 개인의 일탈이 될 뿐이다.... 논쟁은 이성애-이원 젠더 구조를 절대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이성애-이원 젠더 구조를 은폐하고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앞서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한국은 거의 모든 공적 공간이 성행위를 할 수 있는 곳이지만, 그곳은 거의 항상 누군가가 엿볼 수 없도록 창문을 가린 구조를 취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대관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고요? 그 당사자가 이성애-이원 젠더 클럽에 간 이성애자 남성이었다면, 이야기가 꽤 달랐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언론들은 동성애자들의 성생활까지 관심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사들은 무척 잘 소비되고요. 여기에서 가상의 이성애자 남성 A씨를 상정하고 그가 파트너를 찾기 위해 여러 클럽을 돌아다니고 어느 모텔이나 DVD방 같은 곳에 갔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국민일보>를 비롯한 언론들이 그렇게 보도에 열을 올릴까요?

그런데 그날의 전파자가 이성애자가 아니라면 이야기가 꽤 많이 달라집니다. 이번 이태원 클럽발 전파자 남성을 X씨로 가정하겠습니다. 바이러스의 슈퍼 전파 문제, 그가 클럽을 몇 군데 갔는지에 대한 문제 등의 이야기는 X씨를 한참 넘어 이태원에 성소수자 클럽이 얼마나 있고, 거기에 성소수자들이 얼마나 모이며,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 섹스를 한다 등의 이야기로 번집니다. 거기에서 아웃팅이나 퀴어의 일탈화, 그리고 방역에 구멍을 뚫는 일탈적 존재로의 호명 등의 문제가 시작됩니다. 퀴어 당사자에 대한 공격 또한 이루어지고 말이죠. 가장 유명한 성소수자 연예인 홍석천 씨의 SNS에는 “왜 게이들은 방역을 거부하고 잠적하느냐?”는 투의 댓글이 거의 사이버불링(사이버 공간에서 특정인을 집단적으로 따돌리거나 욕설, 험담 따위로 집요하게 괴롭히는 행위) 수준으로 달렸습니다. 게이 클럽이나 게이들의 섹스 컬처가 이루어지는 곳에 대해선 폐쇄해야 한다는 주장이 빗발쳤고요.

외국에서 열린 게이 프라이드 퍼레이드에 참여한 성소수자들. (이미지 출처 = Pixabay)

한국 사회에서 퀴어로 살아남기

한국 사회는 퀴어에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대적이고 공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퀴어들 중에는 자신이 퀴어임을 밝히지 않거나, 밝혀지는 것을 원치 않는 경우가 무척 많습니다. 원치 않게 자신이 퀴어임이 밝혀지면, 그러니까 아웃팅(당사자가 원치 않았는데 성적 정체성이나 지향성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당하면 학교나 직장, 인간관계 등에서 유/무형의 불이익을 당하거나 증오범죄(소수자나 사회적 약자를 타겟으로 하는 범죄)의 타겟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질병관리본부와 서울시에서 해당 클럽에 갔던 1309명에게 어떠한 불이익도 돌아가지 않도록 할 테니 검역 절차를 밟으라고 해도 쉽게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공적 시스템도 믿기 힘들겠지만, 그 이상으로 공적 시스템 하의 사람들은 더욱 믿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검역 절차를 밟으려면 필연적으로 보건시설에 가서 사람들과 마주쳐야 하는데, 아무리 그들이 ‘(이태원) 클럽 다녀오셨어요?’ 정도만 묻는다고 해도, 그 일련의 과정들이 당사자들에겐 무척이나 고민되고 힘들고 또 어려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질병관리본부의 브리핑 등에서 성적 지향성 등은 방역에 있어 하나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검사를 받는 당사자의 신원을 묻지 않고, 보호하는 방식으로 검사를 진행하겠다는 정책이 세워지고 실행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 의료계 관계자들도 성적 지향은 중요하지 않다는 입장을 내놓았으니 상황이 그렇게까지 절망적이진 않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상해 봅니다. 검사자도 꾸준히 늘고 있다고 하고요.

그럼에도, 이 사회는 ‘동성애’ 하면 가장 먼저 ‘음란’을 떠올리고, 어딘가 이상하거나 병리적인 집단으로 주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게이 집단이 실제로 음란한지 아닌지가 아니라, 특정 주체, 즉 성소수자들을 문제적이고 병리적인 집단으로 만들어 가는 ‘사회적 폭력’일 것입니다. 그러한 폭력이 작동하기 때문에 행동 하나하나가 일상이 아닌 일탈로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클럽에 가는 행위는 누구나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상적인 행동이 아니라, 음란의 주체가 자신을 돌보지 않는 것을 넘어 타인까지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는 무책임한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성소수자는 ‘보통’과 ‘일상’에서 분리되고 괴리되어 ‘비정상’과 ‘일탈’의 행위자로만 남게 됩니다. 즉 주체가 되지 못하고 비체(abject)로만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성소수자에게서 ‘보통’의 삶의 얼굴을 빼앗는데, 당사자들은 ‘괴리화’, 혹은 ‘소외’의 상태에 놓입니다.

한편으론 장기화된 코로나 사태는 이 사회의 개인과 가족, 개인과 회사 등을 이루는 관계를 조금씩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성소수자 당사자가 느끼는 공포, 예컨대 동선이 공개되는 것이나, 가족에게 자신이 성소수자인 것이 알려지는 것이나 직장에서 해고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은 사실 사회가 만들어낸 소수자에 대한 차별의 결과입니다. 모든 게 불안정해지는 팬데믹 상황에서 아웃팅은 평소보다 더 큰 파급력을 지닐 테니까요.

가장 낮고 누추한 곳의 서발턴들을 위하여

이 시점에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바로 ‘타자의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타자가 바이러스를 옮기는 ‘삶의 침해자’가 아니라는 기본적인 생각을 넘어서, 우리가 각자 가지는 나-타자 관계가 얼마나 취약한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취약한 관계는 혐오와 공포, 공격을 쉽게 전파합니다. 이번에도 코로나바이러스가 어떻게 전파되는지와 별개로, 혐오는 관계의 약한 곳들을 파고들었습니다.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요. 그리고 그 약한 곳에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우리가 수많은 관계성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 관계성에는 생각보다 취약하고 연결이 끊기기 쉬운 부분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혐오와 폭력은 관계성의 약한 부분부터 파고들기 마련입니다. 그 약한 사회적 관계망을 고치고 모두를 동등한 ‘시민’으로 대할 수 있다면, 혐오는 약한 대상을 공격하거나 약한 관계들을 파고들지 못할 것입니다.

마침 지난 5월 17일은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은 5.18 광주민주항쟁 40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혐오와 폭력이 사회의 약한 관계망들을 끊지 못하도록 싸워 온 역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성소수자 하면 ‘음란광란 동성애축제’ 따위만 생각하고 킥킥거리기 바쁜 구시대의 관념을 깰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소수자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비롯한 서발턴(여성이나 노동자, 이주민과 같이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되고 억압을 당하는 사람. 또는 그런 무리. 하위 주체)들을 동등한 시민으로서 우리와 함께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사회적 관계망의 가장 낮고 약한 곳에 있는 사람에게 자기 몫이 돌아가는 것이 평화이고, 몫 없는 자들의 몫을 위하는 것이 민주주의니까요. 그리고 가장 낮고 누추한 곳과 그곳의 ‘말할 수 없는’ 서발턴만을 찾던 그리스도의 정신일 것입니다.

2008년 촛불 때 다음 '아고라'에서 ‘이명박 탄핵 천만 서명’을 받던 고등학생 안단테는 "어떤 역사적 진보를 이루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가능'하다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실천에 옮김으로써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비록 천만 서명도, 이명박의 탄핵도 이루어내지 못했지만 그는 시기상조의 벽에 온몸을 날린 가장 멋진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 안단테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기상조와 싸워 온 그에게 짧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장성렬(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
정치학과 사회학을 배웠고, 페미니즘과 아나키즘을 공부하고 있다. 권위와 폭력을 늘 경계하고 민주주의와 민주화에 대해 글 쓰며, 비슷한 주제로 사진을 찍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활동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청년담론> 평등문화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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