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29

  거룩과 자비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결정적 사건이 있다면, 예수가 예루살렘에 갔다가 ‘타락한’ 성전 질서를 목도하고는 성전 구역(4만4천 평 가량) 내 환전상들과 제물 판매상의 탁자와 의자를 뒤엎으며 분노했던 일일 것이다.(마태 21,12-17; 마르 11,15-19; 루카 19, 45-48; 요한 2,13-22) 사제단과 율법학자 그룹 중심의 당시 성전 질서, 사실상의 최고 권력기구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비쳐진 이 사건으로 인해 예수는 결국 하느님의 ‘거룩한’ 질서를 거스르고 무너뜨리는 불경죄로 죽음의 길에까지 내몰리게 되었다. 온화할 것만 같은 예수도 불의하다고 간주되는 상황 앞에서 어느 정도까지 분노할 수 있는 사람인지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례일 것이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공관복음서에 한결같이 전해져오는 예수의 경고이다: “성서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구나!”

  선민과 만민

  이 말은 식민지배자 로마와 타협하며 공생하던 당시의 왜곡된 성전 질서에 대한 고발이자, 성전 영역 안에서 발생한 이익을 자신의 것인양 챙길 뿐만 아니라 ‘거룩’의 이름으로 사람을 차별하고 분리시키는 이들이 사실상 하느님의 것을 빼앗은 ‘강도’라는 강력한 비판이다. 의인과 죄인, 남자와 여자, 거룩과 속됨, 정결과 부정, 선민과 이방인 등으로 사람을 분리하고 차별하는 이른바 ‘거룩의 정치학’에 대한 반대이자, 성전이야말로 하느님의 ‘자비’로 모든 이의 구원을 지향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선언인 것이다.

  그러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열쇠말이 바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 더 줄이면 ‘만민’이다. ‘만민’은 당시 성서 용법이 그렇듯이 일차적으로 ‘이방인’을 뜻하는 말이다. 당연히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에는 영적인 하느님(요한 4,24)을 벽돌 건물 안에, 특정 신분, 종파, 혈연 안에 가두는 행위가 종교적 강도행위라는 비판과,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만민’, 즉 이방인에게도 열린 곳이어야 한다는 자비의 보편성에 대한 선포가 내포되어 있다.

  거룩한 ‘선민’의 이름으로 ‘이방인’을 그 자체로 죄인인양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예수는 신의 이름으로 죄인을 양산하는 모순된 체제를 거부하고, 유대인/로마인, 의인/죄인, 남자/여자, 부자/빈자 사이의 차별을 두지 않은 채, ‘거룩의 정치학’이 배제한 사람들을 포용하는 ‘자비의 정치학’을 펼치고자 했다.

  이방인의 하느님

  이런 분위기는 한 동안 초기 교회에 반영되기도 했다. 가령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말했다: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갈라, 3,28) 예수를 따른다면서도 유대인과 그리스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 등을 나누고 차별하던 당시의 현실 상황에 견주면 파격적이라 할 만한 바울로의 가르침은 오늘의 교회 현실에 비추어서도 여전히 돋보인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제한이 달려있기는 하지만, 그 파격성을 오늘의 맥락에 적용하면, 그리스도인과 불자를 한 몸으로 간주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의 발언이기 때문이다. 바울로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일갈한다: “하느님은 유다인만의 하느님인줄 압니까? 이방인의 하느님이시기도 하지 않습니까? 과연 이방인의 하느님도 되십니다.”(로마 3,29) 

  “이방인의 하느님”이라는 바울로의 말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예수의 말과 근본 정신에서 통한다. 일차적으로는 그리스도교 신앙조차 여전히 유대교 율법을 기준으로 파악하려는 초기 신자들을 경계하는 말이었지만, 이차적으로는 이른바 타종교를 배타시하며 구원의 반열에서 제외하려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긴요한 말이기도 하다. 넓게 해석해 이방인이 교회 밖의 사람들이라면, “이방인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문자적 율법 안에 동질화시키려는 이른바 ‘동일성의 철학’을 벗어나서, 신분, 종파, 혈연 등의 다양성을 구원의 보편성 안에 확보하려는 의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타’종교의 하느님

  다양성, 특히 종교적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소화하려는 신학을 흔히 ‘종교 신학’(theology of religion)이라 부른다. 이른바 타종교를 그리스도교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그리스도교적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방인의 하느님”이라는 말에 들어있듯이, ‘종교신학’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교가 정말 다른 종교들을 단순히 대상적으로, 즉 자신과는 ‘다른’[他] 종교로 바라볼 수 있는 독립된 하나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근원적인 물음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한 질문을 받으며 오늘의 신학은 진지한 답을 모색 중이다.

  신학적 해설을 길게 할 여유는 없지만, 하느님은 “유다인의 하느님”이기도 하지만, “이방인의 하느님”이기도 하다는 바울로의 말이나, 성전이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예수의 지적에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맥락에 어울리게 답하자면, 하느님은 이른바 ‘타종교’ 안에도 계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를 대상화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안에 계신 하느님의 눈으로 다른 종교 안에 계신 하느님의 모습을 본다는 뜻이 된다.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 역시 만민이 기도하는 그곳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뜻이 된다. 하느님은 영이시기에, 유다인이 주장하듯 예루살렘만 예배 장소인 것도 아니고, 사마리아 여인이 알고 있듯 그리심산만이 예배 장소인 것도 아니다.(요한 4,20-21) 하느님은 시공간에 갇히지 않는 영적인 분이시기에, 장소를 나누지 않아도 하느님은 어디든 계시다는 것이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 혹은 “이방인의 하느님”이라는 말에 이미 들어있듯이, 하느님은 그리스도교 ‘안’에도 계시고, 타종교 ‘안’에도 계시며, 그리스도교와 타종교 ‘사이’에도 계시다. 그리스도교만이 주체이고 타종교가 객체인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느님을 모신 주체이다.

  이슬람 안에, 불교 안에, 심지어 무신론자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부과된 요청이자 꼭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이천년 전 바울로가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해 혈족과 문자적 율법 중심의 종교 형태를 벗어나는 보편성의 기초를 닦았다면, 오늘날은 설령 외적 교리 체계가 다른 듯해도 하느님은 그 ‘다른’[他] 곳 안에도 계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신앙의 핵심으로 볼 줄 아는 안목이 요청되는 때이다.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이찬수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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