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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함과 친해지기[신학 오디세이아 2 - 박정은]

우리는 누구나 확실한 걸 좋아한다. 분명한 사람, 잘 계획하는 사람들을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이것 대로만 하면, 나의 삶은 걱정할 것이 없어’라고 믿기 시작한다.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을 다니고, 좋은 신앙생활을 하면, 내 삶은 영원한 보험을 든 것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함께 주일학교 교사를 하던 친구가, 자기는 가톨릭을 떠났다면서, 내게 너는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고 물었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는 구원의 확신을 준다고도 이야기했다. 나는 그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 마음이 답답했다. 누가 하느님의 구원을 확신한다면, 그 말 때문에, 그 사람은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요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네가 보인다고 하니 너는 보지 못하는 자이다”라고 하시는데, 무언가를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나는 사실 무섭다. 내가 확신하는 것은, 내가 무한이신 하느님을 아직도 모르며, 그저 그분을 알고자 하는 갈망을  따라 살다가, 그분 자비 앞에 서게 될 거라는 점뿐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확신한다는 것은 거의 맹목이며, 삶의 본질에 눈을 감는 자세이다.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작은 기쁨을 행하고 찾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지혜일 것이다.

하여튼, 이번 코로나 사태로 우리는 그저 적당히 덮어 두었던, 우리의 모습을 들키기 시작하는 것 같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에게 확실하고 분명했던 세상의 질서가 하나하나 불편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미국이나 유럽을 동경하고, 늘 선진국이란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이 나라들의 속살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내가 사는 미국을 보면, 테스트도 못 받는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 노동을 하게 해달라고 항의를 하기도 했는데, 자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온라인 수업에 들어오지 못하고, 계속 하루에 열두시간 넘게 일하고 있는 내 학생 들의 피곤한 일상이 마음이 아팠다. 나는 사회정의와 영성 수업으로 함께 남부에 다녀온 학생들에게 안부 문자를 보냈는데, 여러 명의 학생이 생명을 담보로 노동을 하고 있었다.  아메리칸 드림은 어디로 간 것인가? 가장 잘 산다는 미국의 가난한 대학생들은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무엇이 확실한 것일까? 삶 자체가 불확실한 것인데, 무엇이 확실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멈춘 듯한 코로나 시대에, 파란 생명을 활짝 피운 들꽃 ⓒ박정은 수녀

하지만 그럼에도 삶은 현재 진행형이다. 여전히 집에 머물러야 하는 명령이 선포된 가운데, 꽃은 활짝 피었고, 꼬맹이들의 키는 한 뼘은 더 커졌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온라인으로 졸업을 했고, 소셜미디어에 자신들이 이루어 낸 것에 대해 기쁨을 한껏 표현했다. 나도 열심히 “좋아요”를 누르며, 이 젊은이들을 힘껏 응원했다. 학교에서 졸업식을 했다면, 나는 물론 나의 학생들을 하나하나 안아 줄 것이고, 축하해 줄 것이었다. 가난한 이민자 부모님의 딱딱하고 주름진 손등을 어루만질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몸담고 있는 이 학교의 미션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학생들에게 축복을 보냈을 것이었다.

그러면서 문득, 모든 것이 가상 실재 (the virtual reality)가 되는 이 현실에서 만지거나 냄새 맡거나 하는 감각을 잃어버린 우리의 삶은 어떻게 채워질 것인지 궁금해졌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감각에 의해 인식되는 세계다. 성체 성사가 내게 영원한 그리움인 것은 어린 시절 평일 미사에서 앞자리에 앉아 보던 하얀 밀떡, 그리고 신부님이 따르시던 포도주에서 나오던 아찔한 향기, 그리고 내 입안에서 가만히 녹아 내던 성체의 결 때문이었다. 성체 봉사자가 되었든, 사제가 되었든, 내 손바닥에 성체를 놓아 주는 그 순간에 느껴지는 어떤 감각, 그런 것이 갑자기 그리워졌다. 쥼으로 하는 온라인 수업도 재미있지만, 그 수업에서는 내 학생들의 땀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학생들의 상큼한 핸드크림 냄새도 나지 않는다. 그리고 “너희들 공부 안하면 죽었어” 하면서 장난을 치는 재미도 더는 없다. 물론 나는 믿는다. 이제 새로움 속에서 또 새로운 세대들은 적당한 감각을 찾아내리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성사도 새로운 감각을 찾아내리라는 것을.

아직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과 교회를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조금 시기상조일 것 같다. 하지만, 이 바이러스로 인해 새로운 삶의 방식이 시작될 것이다. 사실 우리의 문명은 순차 열의 배열처럼 1, 2, 3, 4…. 로 바뀌어 가는 게 아니고 어느 순간, 여러 요인이 작용하여, 1, 2.…9…로 갑자기 뛰어오르면서 변화한다. 그러고 이런 변화가 생길 때마다, 혹은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때마다, 많은 사람은 고통을 겪었다. 우리는 역사 시간에 배웠다. 산업혁명 시대에 기계가 등장하면서, 많은 사람은 일터를 잃었고, 배고픔으로 죽어갔다는 것을. 그럴 때, 신앙인들은 당면한 사회 속의 과제를 바라보았고, 고통받은 그리스도를 뵈었으며, 거기에서 자기 신앙의 가치를 발견하고, 아름다움을 찾았다.

우리가 사는 오늘날의 사회를 우리는 글로벌 자유경제 시대라고 부른다. 이 체제는 소비에 대한 욕망에 기반해서, 더 많이 사고, 더 많이 낭비함으로 굴러가는 경제인데, 가지지 못한 자의 아픔도 너무 빤히 가까이 대해야 하는 그런 세상이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우리 시대의 경제가 잠깐 주춤했다. 매일 밖에 나가서 하던 많은 소비 활동들이 멈추어 섰다. 앞으로 무한정의 소비를 부추기는 세상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갑자기 멈추어 선 지구에, 생명들이, 자연이 되돌아왔다고 기뻐했지만, 많은 과학자는,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류는 더욱 자연을 파괴하는 발전 모드가, 배가 될 거라는 우려를 표명한다.

한국은 다행히 일상생활로 되돌아 간 듯 하지만, 온 지구는 아직도 코로나 사태에서 벗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확실히 어떻게 교회가 변해야 하는지, 세상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래도 인류가 이 시기를 창의적으로 견디고 바꾸어서, 욕구 중심의 소비 경제가 아니라 분배 중심의 공생경제, 외양 만을 보는 감각에서 내면의 결과 향을 함께 중시하는 찐 감각의 세상을 향해 같이 온 인류가 나아가기를 소망해 본다. 가난한 자의 땀과 눈물이 잘 보이고, 그들의 아픔과 소외가 글로벌한 가운데 놓여지기를 소망해 본다. 그게 코로나로 잠시 멈춘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기도할 일이다. 확실하지 않은, 불확실한 현실에 기대어 희망을 기도할 일이다. 그리고 나는 불확실성의 시대 속으로 성큼 뛰어든 내 사랑하는 학생들의 삶에 축복을 보낼 일이다.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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