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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4월 30일-5월 3일)[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선과 악의 목소리를 구별하는 은혜를”

교종, 부활 제4주일 부활삼종기도 가르침

프란치스코 교종은 5월 3일 부활 제4주일이자 착한 목자 주일 부활삼종기도 전 가르침에서 복음(요한 10,1-10)에 나오는 착한 목자와 양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선과 악의 음성을 구별해야 하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가르침 내용.

오늘 복음에서는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3절)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듣지 말아야 할 다른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양들에게 해를 끼치고자 하는 낯선 사람, 도둑의 목소리입니다. 이러한 목소리는 우리 안에서도 공명합니다. 양심에 따라 친절하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이 있으며, 악으로 이끄는 유혹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감과 악한 죄악의 목소리를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목소리를 분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합니다. 즉,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반대 방법입니다. 하느님의 음성은 결코 우리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제안하시지만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악한 목소리는 유혹을 불러일으키고 힘을 냅니다. 눈부신 환상, 유혹적인 감정을 일으키지만 일시적입니다. 원수의 목소리는 우리가 현재에서 멀어지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과거에 대한 슬픔에 집중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진정한 평화의 목소리는 결코 값싼 기쁨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아를 뛰어넘어 진정한 선과 평화를 찾도록 초대합니다. 결국 하느님의 목소리와 유혹자는 전혀 다른 방향을 말합니다. 원수는 어둠과 거짓과 험담을 선호합니다. 주님은 햇빛, 진실, 투명성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선한 목자의 음성을 인식하고 따르도록 은혜를 청해야 합니다.

한편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날 부활삼종기도를 마치기 전 코로나 희생자들과 고통 받는 사람들과의 유대와 친밀감을 강조했다. 또한 교종은 오늘은 세계 성소의 날이라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 나라에는 많은 일꾼들이 필요하며, 우리는 하느님께 그분의 현장에서 일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종은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항상 어떤 삶의 상태에서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했다. 또한 교종은 사제직과 봉헌생활에는 용기와 인내가 필요하며 기도 없이는 이 길을 따라갈 수 없다고 말했다. 교종은 “저는 모든 사람을 초대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위해 마음과 손을 열어 주시고 주님을 위해 선한 일꾼들의 선물을 하느님께 구하십시오.”라고 말했다. 특히 교종은 코로나 팬데믹에 대해 “투명하고 공정한 방식으로 과학적 능력을 종합하여 백신과 치료법을 찾고 전 세계 모든 감염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필수 의료기술에 대한 보편적 접근을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교종은 어려운 시기에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5월 14일, 모든 종교의 신자들이 기도와 금식을 통해 영적으로 연합하여 간청해야 한다는 ‘인간친교를 위한 위원회’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교종은 하느님께서 인류가 코로나 전염병을 극복하도록 도와달라고 간구하면서 5월 성모의 달을 맞아 신자들이 성모님께 영적선물로 많은 기도를 바쳐 달라고 격려했다.

 

“주님은 착한 목자, 우리는 양 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 5월 3일 부활 제4주일 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5월 3일 부활 제4주일이자 성소 주일인 5월 3일 산타 마르타 집에서 봉헌한 주일미사에서 의사와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들을 양 떼를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에 비유했다. 교종은 코로나 사태 동안 환자를 돌보다 희생된 백 명 이상의 사제와 많은 의료진의 헌신은 우리 교회가 거룩하고 충실한 하느님의 백성들을 돌보는 데 모범적인 사례가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교종은 제2독서(베드로 1서 2,20ㄴ-25)와 복음(요한 10,1-10)에 나타난 착한 목자들의 모습을 설명했다. 

강론 내용.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길을 잃고 헤매는 양들을 구하시는 목자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의 죄를 당신 몸에 지음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우리 영혼의 수호자인 목자에게 돌아 왔습니다.(베드로 1서 2,24-25절 참조) 요한 복음 저자는 예수님은 목자일 뿐 아니라 ‘양 떼가 들어가는 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양들은 목자를 압니다. 그러나 불행하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많은 ‘가짜 목자’들이 주님의 양 떼를 강탈하고 착취하기 위해 들어왔습니다. 가짜 목자들은 양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돈과 출세를 위한 사다리, 정치뿐입니다. 그러나 양들은 누가 선한 목자이며 누가 강도인지 알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의 무리로 구별됩니다. 목자가 양을 듣고, 돌보기 때문에 양 떼가 번성합니다. 양들은 선한 목자 즉 예수님과 비슷한 목자들에게만 자신을 맡깁니다. 이런 점에서 양의 무리는 결코 실수하지 않습니다. 양 떼들은 예수님과 같은 목자들에서만 확신을 얻습니다. 목자의 스타일은 예수님의 스타일이어야 합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스타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21절)며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고 촉구하십니다. ‘착한 목자’는 예수님의 온유하심의 상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목자가 온유하지 않으면 자신을 목자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무언가를 숨기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는 부드럽게 양들의 각자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양을 하나 뿐인 것처럼 각자를 돌보아 줍니다. 실제로 목자는 하루가 끝날 무렵 한 마리 양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신의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찾아 나설 것입니다. 이것이 훌륭한 목자이며, 이것이 예수님을 닮은 목자인 것입니다. 이 같은 착한 목자와 양의 이미지는 부활절의 아이디어입니다. 부활찬송은 새로 세례를 받은 ‘어린양’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원하는 교회이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교회를 돌보십니다. 오늘 착한 목자 주일은 아름다운 주일입니다. 목자가 우리를 돌보아 주심으로 평화와 부드러움과 온유의 주일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입니다. 이밖에 우리가 원하는 것은 없습니다.

 

제 57회 세계 성소 주일 기념

전 세계 교구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행사

전 세계 가톨릭교회는 부활 제4주일인 5월 3일 제57회 ‘성소주일’을 기념했다. 각 교구에서는 ‘착한 목자 주일’이라고도 불리는 이날 성소증진을 위한 다양한 방식의 행사로 신자들에게 성소를 장려했다. 이날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은 사제와 종교 및 봉헌생활을 장려하고 그런 희망을 키우는 사람들을 위해 특별한 기도를 드렸다. 성소주일 연례행사는 1963년 바오로 6세 교종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지난 3월 8일 올해 준수사항을 담은 메시지를 발표했다. 교종은 메시지에서 4가지 핵심단어인 고통, 감사, 격려와 찬양을 생각해 보라고 초대했다. 또한 교종은 지난해 8월 사제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 네 단어들을 제시한 바 있다. 전 세계 지역교회는 현재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지역형편에 맞는 창의적인 방법으로 이날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위기의 순간에 닥치는 유혹을 극복하자”

교종, 5월 2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5월 2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를 주님께서 코로나 팬데믹 대처에 노력하는 정부지도자들과 국회의원, 시장, 군수 등 모든 수준의 국가지도자들을 도와주시고 힘을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봉헌했다. 교종은 지도자들이 자신들 사이에 이견이 있을 때는 갈등보다 연합이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더 낫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다. 교종은 이날 강론에서 독서와 복음을 인용하면서 교회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에서 겪는 평화와 위기의 순간에 대처하는 것에 대해 설명했다. 

강론 내용.

오늘 첫 번째 독서(사도 9,31-42)에 따르면 초기교회는 평화로운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은 많은 제자들이 더 이상 예수를 따르지 않기로 결정했을 때 위기의 순간을 보여 줍니다.(요한 6,31-42)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습니다.”(31절) 이 설명은 당시 교회가 평온한 가운데 위로를 경험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삶은 평화의 순간뿐 아니라 위기의 순간이 함께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많은 제자들이 소화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들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이 같이 중요한 순간은 우리의 선택의 순간입니다.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에게도 자신을 떠나길 원한다면 선택하도록 요구하셨습니다.(67절 참조)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68-69절) 이는 베드로의 두 번째 신앙고백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신뢰했습니다.

아르헨티나에는 "말을 타고 강을 건너야 할 때는 강 한가운데서 말을 바꾸지 말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는 위기의 순간을 살아가는 방법을 설명하는 속담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어 떠나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말을 바꾸어 탄 것입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는 인내하고, 침묵하며, 우리 신념에 계속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 변화를 위한 순간이 아니라 충실하게 남아 있어야 하는 순간입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진실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더 나은 변화를 격려할 수 있습니다. 선한 것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하는 태도에 대한 요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의 순간과 위기의 순간을 모두 관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믿음의 위기에 강해지기 위해 불을 피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가 재난의 순간에 닥치는 유혹에 저항하는 방법을 알고 평화의 순간에 따르는 희망을 가지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깨달아 위기의 순간에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 힘을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노동은 하느님 창조사업의 연속입니다”

교종, 5월 1일 ‘노동자의 성 요셉 축일’ 미사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5월 1일 ‘노동자의 성 요셉’ 축일이자 국제 노동자의 날인 이날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를 모든 노동자들을 위해 봉헌했다. 교종은 미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오늘 노동자의 성 요셉 축일과 노동자들에게 헌신하는 날 우리는 모든 노동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노동의 존엄성과 이들이 아름다운 휴식의 혜택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산타 마르타의 집 경당에는 노동자의 성 요셉상이 장식되었으며 교종은 이날 제1독서(창세기 1,26-2,3)에 나타난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에 대해 설명했다. 

강론 내용.

인간의 노동은 정확히 하느님 일의 연속입니다. 인간의 노동은 우주가 창조된 이후 인류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입니다. 노동은 일을 통해 남자와 여자는 창조자 역할을 하며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심지어 가족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하느님과 비슷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자신이 이루신 일을 보고 “모든 것이 참 좋았다”(1,31)고 만족해 하셨습니다. 노동 자체에는 선함이 있고 아름다움과 선함 사이에 조화가 생기며, 사람의 모든 부분이 관련됩니다. 노동은 인간의 첫 번째 직업입니다. 노동은 인류에게 위엄을 줍니다. 노동의 존엄성은 우리를 하느님과 비슷하게 만듭니다. 어떤 남성이 가족을 위한 음식을 구하기 위해 까리타스를 방문했습니다. 까리타스 직원이 그에게 “빵을 집으로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 남성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음식을 집으로 가져가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매일 일을 해서 빵을 벌고 싶습니다.” 노동의 존엄성을 짓밟는 일은 인류역사 전체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주민이 아메리카에 노예로 끌려가는 것에서부터 현대의 노예까지 많은 노예들이 있습니다. 많은 남성과 여성이 자유롭게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살 수 없을 만큼 일해야 합니다. 그들은 강제노동의 노예입니다. 비참한 봉급을 위해 하루 12~14 시간을 일하는 현대판 노예들은 한정된 지역에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역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에게 부당한 모든 불의는 인간의 존엄성과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 자신의 존엄을 짓밟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은 재창조입니다. 이는 단순노동보다 훨씬 더 높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합당하고 인간 존엄성이 존중되는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모든 사람이 일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일에서 공의를 달성하기 위해 싸우면서 또한 일터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을 공의로 대하는 사업가들과 연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일의 도구를 갖춘 아름다운 이미지를 가진 성 요셉께 일의 존엄성을 위해 싸울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을 위한 일이 있을 수 있고 노예가 아닌 품위 있고 위엄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합시다.

 

“오직 하느님만 사람들을 회심시킬 수 있다”

교종, 4월 30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4월 30일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를 코로나 팬데믹 사태로 숨진 이들 가운데 특히 집단 매장되는 사망자들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무연고 사망자들을 위해 기도했다. 교종은 강론에서 이날 복음(요한 6,44-51)의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44절) 구절을 집중적으로 설명했다. 

강론 내용.

사람들이 종교나 신학을 공부하고 예수님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우는 것은 가능하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그리스도나 그분에 대한 신비를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 사도행전(8,26-40)에 나오는 에티오피아 내시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는 에티오피아 왕실의 공무원이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기 수레에 앉아 성경 이사야 예언서의 구절을 읽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의 마음을 준비시키셨으며, 그에게 필리포스를 보내셨습니다.(29절) 왕실 공무원 내시가 느꼈던 불안은 정확히 아버지께서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필리포스의 설명을 듣고 물을 보았을 때 세례를 청했습니다. 바로 이 원리를 복음전파 사도적 사역의 기초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사도직,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도적 임무에 유효합니다. 회심의 역사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누군가를 회심시킬 수 있습니다. 오직 아버지만이 누군가를 예수님께 이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다만 증거하는 것입니다. 선교사업에서 사람들에게 신앙의 진리에 대해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참된 선언이 되려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통해 증거해야 하며 아버지께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사업을 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합니다.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열게 합니다. 증거와 기도는 함께 갑니다. 증언과 기도가 없이는 복음전파 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설교는 매우 아름답지만 아버지의 행동이 없으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끌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증언은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의 메시지와 신비를 환영하게 합니다. 그런 다음 기도는 아버지의 마음을 열어 그분 자신이 사람들을 예수님께 이끌 것입니다. 이것은 선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도직의 으뜸 규칙입니다. 그러나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삶으로 증거하는 것이지 개종을 선포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데려 갈 수 있도록 우리가 증언과 기도로써 우리의 사역을 수행할 은혜를 주님께 구합시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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