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엄기호] "나, 조선소 노동자", 마창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 코난북스, 2019

글이 길어 두 번에 나눠서 게재한다. 첫 번째에서는 이번 선거의 의미와 책 읽는 것과 교양의 의미, 그리고 이 둘이 합쳐서 왜 이번 선거와 같은 결과를 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에서는 반대로 그런 교양을 쌓는 이들이 어떤 함정에 빠질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왜 이 책 "나, 조선소 노동자"를 읽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려 한다.


선거가 끝났다. 예상했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결과다. 여당의 압승이다. 극우보수 야당은 몰락에 가까워졌다. 양당체제가 강화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번에 다당제를 기대했던 사람들의 입장이고 양당체제라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보수 야당은 몰락했다. 어떤 식으로 수습할지 그조차 불분명해질 정도다. 누군가의 말처럼 한국의 주류 세력이 교체된 것일 수도 있고, 본격적인 보수정당의 시대가 도래한 것일 수도 있을 테다. 

그러나 문화연구를 하는 사람으로서 이번 선거 결과가 보여 주는 한 가지 분명한 결과가 있다. 그것은 혐오스러운 말을 일삼는 불쾌한 사람들은 거의 다 아웃되었다는 것이다. 문화연구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번 선거를 지배한 정서는 ‘혐오에 대한 혐오’, ‘혐오에 대한 경멸’이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혐오는 약자에 대한 혐오가 아니다. 그런 혐오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이고 지배적이다. 성소수자와 여성과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에 대한 혐오 말이다. 

내가 말하는 ‘혐오’는 교양 없음에 대한 혐오다. 아스팔트 우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의 상당 부분이 이념적 지향에 대한 혐오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들의 태도에 대한 혐오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혐오, 그들의 말에 대한 혐오다. 그 말과 태도의 교양없음, 대화불가능함에 대한 혐오다. 그들의 말은 교양 있는 사람들에게 ‘말’로 여겨지지 않는다. 소리, 그것도 시끄러운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말이 아니라 소리일 때 그는 혐오스러운 존재가 된다. 사람들은 이들과 더 이상 대면하고 싶어 하지 않고,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보기 싫은 존재니, 눈앞에서 치워야 한다. 그리고 이번 선거는 그 사람들을 우리 눈앞에서 치워버렸다. 이념적 지향을 떠나서 교양을 갖추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번 선거가 통쾌한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 조선소 노동자", 마창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 코난북스, 2019. (표지 출처 = 코난북스)

나는 이번 글을 통해 이번 선거 이후 그리스도교인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책 한 권을 소개하고 싶다. 특히 저 혐오스러움을 혐오하여 그들을 치워버리는 투표를 한 분들에게 말이다. 먼저 이를 위해 생각해 보자. 책을 왜 읽는가. 교양을 갖추기 위해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알기 위해 우리는 책을 읽는다. 내가 모르는 세계를 알 때, 나는 그 세계의 말을 이해하게 되고 내 말은 확장된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은 여러 가지 목표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것 중 하나가 교양을 갖추는 것이다. 

교양을 갖춰 비로소 못 알아듣던 말을 듣게 되어, 그 말을 하는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그 사람과 말을 할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사람’이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사람이란 말을 통해 다른 사람과의 ‘사이’를 짓는 것이고, 그 ‘사이’를 우리는 세계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이라는 세계는 일시적이다. 신학자는 아니지만 성경에 대한 조그마한 지식에 기대 인간의 눈으로 본다면 이 세계는 ‘세계’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거대하고, 속적이지만 하느님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지혜서(11-12장)에 나오는 말처럼 세계는 하느님 앞에서는 그저 천칭의 조그마한 추이고, 이른 아침에 떨어지는 이슬방울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부질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부질없는 것 안에 거주(하이데거)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이 만든 인간이 거주하는 이 세계, 당신이 지은 인간이 지은 이 세계를 사랑한다. 지혜서의 말처럼 하느님은 당신이 지으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지으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다.(<가톨릭프레스>에서 다시 퍼옴.) 그렇기에 인간이 오만하게도 속적으로 보고 견고한 것으로 보는 이 이슬방울 같은 세계는 여전히 하느님의 눈에도 사랑스럽다. 그렇기에 사람이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아 집을 짓고 거주하도록 말이 사람이 되셨다. 

신학적 해석이 아니라 문화이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 말을 통해서만 인간은 하느님과 교통하는 것뿐 아니라 그들 사이에 다리를 놓고 사이를 만들어 집을 짓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이 사람이 되심으로, 비로소 우리 인간은 집을 짓는다. 비록 때로 그 집은 바벨탑이 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책을 읽는다. 책을 읽어야 말을 배울 수 있고, 배운 말로 모르는 이들과 교통하며 세계를 짓고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을 배워야 세계를 지을 수 있다. 다만 여기에는 하나의 조건이 있으니 반대에 있는 사람도 말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고, 서로 말을 배우려고 할 때 우리는 서로의 말로(자신의 말이 아니라) 교통하기 위해 서투르게 시도한다. 내가 아닌 남이 된 것처럼, 남이 되려는 이 서투른 시도가 교양이며 말의 역할이다. 자기의 말을 외우는 자가 아니라 남의 말을 서투르게 흉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교양의 역할이며 책을 읽는 이유다. 

그러므로 선거 이후, 이 교양없음을 혐오하며, 말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 자들, 그저 악다구니를 지르기만 하는 자들을 말의 세계에서 몰아내서 통쾌한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당연히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을 읽어 말을 넓히고, 말을 넓혀 그동안 교통하지 못하던 사람들과 말을 나누며 사이를 만들고 세계를 지어야 한다. 무엇보다 책을 읽어 나의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이건 말이 아니다. 주문이다.) 너의 말을 서투르게 흉내 내려고 해야 한다. "다시, 책으로"라는 책에서 저자가 전하는 것처럼 마키아벨리는 책을 읽을 때마다 그 책의 배경이 되는 시대의 옷으로 갈아입었다고 한다. 그 시대로 들어가기 위해서 말이다. 나의 말을 전하는 게 아니라 그의 말을 배우고 서투르게 (서로) 흉내 내기 위해서는 – 이 흉내냄, 그것이 서로 말하기다 – 책을 읽어야 한다.  

그중 딱 한 권을, 특히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추천하라고 한다면 "나, 조선소 노동자"를 서슴없이 꼽는다. 사실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이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대상을 내가 그리스도인들로 생각했기 때문에 특히 그리스도인이 그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조선소 노동자"는 작년 한국 출판이 이룬 유례없는 뜻밖의 소식이다. 

왜 그리스도인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간략하게 "나, 조선소 노동자"를 소개한다. 이 책은 2017년 5월 1일 거제의 삼성중공업에서 있었던 크레인 사고 이후 산업재해를 당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정신적 고통에 대한 이야기다. 소위 말하는 ‘생존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분들을 기록 노동자들이 만나 나눈 이야기 사례를 모은 책이다. 5월 1일 노동절에 당한 사고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노동자는 비정규직이며, 그 고통의 당사자들은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나이 든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서슴없이 작년 한국 출판계가 이룬 뜻밖의 소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이 책이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그리고 보편적이지만 숨겨 있는 고통인 산업재해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나마 그동안 이런 책들이 이들 고통의 신체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 것에 반해 이 책이 정신적 고통을 다루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다. 만일 그렇게 ‘소외’라는 측면, ‘고통’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 책의 업적은 그리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구태여 그것을 그리스도인이 읽어야 할 이유도 많지 않다.

오히려 이 책을 그렇게 읽는 건 그저 그런 독서에 지나지 않는다. 늘 사회에는 고통이 있고, 그리스도인이 무식하고 교양 없는 사람이 아니라 어두운 곳을 비추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 사회적 고통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니 당연히 읽고 생각하고 마음 아파하고 연대하려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그저 그런 책읽기 말이다. 보통은 그런 책 읽기로 이 책을 읽을 테지만, 그런 책 읽기로 권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민주화’된 세상이 왔으니 본격적으로 우리가 다루어야 할 고통에 대해 다루자는, 그런 진부한 진보적 시각에서 이 책을 추천하는 것이 아니다. 

우선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위에서 이미 말한 것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혐오스러운 말을 하는 자들, 말을 거부하는 자들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배우지 못한 말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말을 배우고, 말을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정말로 경계해야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지 못함의 두 가지 다른 측면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말-아님의 첫 번째 측면은 이미 위에서 대부분의 교양 있는 그리스도교인들이 혐오한 것같이 악다구니를 쓰며 말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말을 거부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에 말을 배우고, 말을 하려는 자들을 지치게 한다. 그래서 그 끔찍함에 이번 선거를 통해 그들은 대거 쫓겨났다. 말을 하는 것처럼 마이크를 잡고 크게 소리를 질러대던 자들이다. 사실 이번 선거가 한 것은 그들에게서 마이크를 뺏어버린 것이다. 너무 크게 마이크를 잡고 있던 자들 말이다. 또 다시 성경에 기대어 본다면, 예수께서 바리사이와 사두가이 사람들의 말을 뺏어버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나는 본다. 그들의 말은 그럴듯한 말이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짓는 그런 말이 아니었고, 오히려 사람을 배척하는 말이었기에 말이 아니라 시끄러운 소음이었다. 말씀이신 예수께서는 이 말-아니며-말인 척하는 말을 쫓아내셨다.

그러나 말-아님의 두 번째 측면이 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야말로 책을 읽고 교양을 갖춘 그리스도교인들이 저지르기 쉬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나의 ‘말-들을 수 없음’을 그들의 ‘말-할 수 없음’으로 치환하여 그들를 공동체에서, 즉 말의 세계에서 쫓아내는 것이다. 이것은 책을 읽는 이유의 정확한 배신이다. 책을 읽는 이유가 듣지 못하던 사람들의 말을 배워 서투르게 흉내내며 당신의 말로 내 이야기를 하여 그와 나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말로만 바벨탑을 쌓는, 하느님에게 도전하는 행위다. 교양 있는 자들의 교양이 저지르는 가장 큰 범죄다. 하느님을 노하게 하는 그 범죄다. 바로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범한 잘못과 동일하게 말이다.

예수께서 하신 것은 정반대다. 대신 그분이 듣고 말을 건 사람들이 있다.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이다. 마르코 복음에 걸쳐 내내 나오는 수많은 ‘기적’의 이야기는 문화이론을 전공하는 내 눈에는 참으로 박진감 넘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그저 기적, 예수님의 권능을 보여 주는 말이겠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왜 예수께서 ‘말씀’이시며, 말씀으로서 예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설명하겠다.

엄기호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단속사회" 저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