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El baño del Papa, <아빠의 화장실> 또는 <교황의 화장실>

자본주의는 마치 흔들바위같다. 쓰러질 듯 하면서도 좀처럼 꿈쩍하지 않는 그 무게에 권위까지 느껴질 정도다. 현실 공산주의의 희망이 붕괴하고 한 학자는 "역사의 종언"을 단언했지만, 자본주의의 극단이 스스로 파열음을 내는 모습 앞에서도 "자본주의의 종언"을 선언하기에는 쭈뼛쭈뼛하다. 언젠가 다시 자본주의의 기어가 윙-하고 돌아갈 것만 같아서다. 윤활유는 늘처럼 또다른 '거품'일 것이다.

모두의 기대가 하나의 욕망으로 응집되고 분출하는 과정은 죽은 줄만 알았던 자본주의에 활력을 심어준다. 정책입안자들, 언론, 그리고 소위 '순수한 시민'이라는 이들까지 이를 너무도 잘안다. IMF로 무너진 듯했던 한국 자본주의는 남발했던 신용카드와 IT신화로 거품을 만들어 화려하게 부활했다. 거품은 곧 걷어지고 왜곡은 심각한 후유증을 만들어냈지만, 한국 자본주의는 이 또한 부동산 거품으로 해소했다. 정책입안자들의 꼼수만으로 보기에는, 이 거품 안에서 '이번에 한 몫 단단히 잡지 않으면 안된다'던 소위 순수한 시민들의 역할도 막대했다. 지금의 정부가 그토록 대운하니, 4대강이니 목을 메는 것도 '거품'의 효과를 잘 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 <아빠의 화장실(El baño del Papa)>은 작은 마을의 한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며 이런 '거품'에 대해 잘 그려내고 있다. 게다가 영화는 종교가 '거품'에 어떻게 가담하는지도 담담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의 제목은 <아빠의 화장실>로도, <교황의 화장실>로도 해석이 가능한데, 이 영화는 1988년 실제로 우루과이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졌던 헤프닝을 재구성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브라질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작은 마을에 교황이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마을은 난리가 났다. 브라질에서만 2만에서 많게는 20만명이 몰려올 것이라는 언론보도에 마을 사람들은 '이참에 한 몫 잡자'는 기대에 들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당일에 방문한 외지인은 400여명, 그중에 저널리스트가 300명 가량이었다고 한다. 집을 저당잡힌 돈으로 노점을 차렸던 마을 주민들은 허탈함에 빠졌다. '거품'은 희망과 함께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난리법석의 한가운데에서 화장실로 한몫 잡아보려던 '아빠'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늘 입만 열면 "나는 머리를 쓰니까." 라던 이 아빠, 원래 직업은 밀수꾼이다. 주수입이라곤 국경수비대를 피해 자전거로 밀수품들을 옮겨나르는 것이 전부다. "머리를 쓰는" 사람답게 교황방문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피식-한다. 대체 소시지를 팔아서 뭘한다고들 난리인지. 그러나 TV 속 저널리스트는 연신 호들갑이다. 2만일 것이라던 예상 브라질 구경객들은 며칠 새에 20만까지 불었다. 회의하는 이들은 인터뷰에서 제외되고, 집을 팔아 소시지를 팔 거란 어떤 이의 희망에는 흥분에 가득차 답한다. "잘 될겁니다. 봅시다."

그저 비웃기만 하던 아빠는, 그러나 점차 조여오는 현실을 견디기가 어려워지자 슬그머니 '거품'에 솔깃해진다. 자전거로 물건나르며 입에 풀칠이나 근근히 할 수 있었는데, 악덕 국경수비대에 걸려 허탕치기 일수에다 재발한 관절 염증은 그나마도 힘들게 했다. 주위에는 빼앗고 내모는 이들만 가득할 뿐이다. 그나마 의지할 것은 그와 앞서거니 뒷서거니하게 어려운 이웃 동료들이다. 짓누르는 현실에 아빠는 '거품'으로 삐져나간다.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올 것이라던 브라질 구경객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다만 교황만 늘처럼 인자한 미소로 등장한다. 크게 실망한 마을 주민들에게 인자한 미소의 교황은 낭만적인 교시를 내린다. "노동은 살기 위해서만 수행되어서는 안됩니다." 늘 입만 열면 성모신심을 강조하던 교황은 역시 "우루과의 여인들의 헌신에 감동했다"는 말도 덧붙인다. 교황 방문 전 날, 오토바이를 살 것이라던 아빠가 엄마에게 한 몫 잡으면 무얼 사고 싶냐고 묻자 엄마가 기껏 짜낸 욕망이 "세탁용 녹말과 전기세"였는데도 말이다. 자본주의는 가족 단위의 생존을 요구하고, 가족 단위는 엄마의 희망을 "세탁용 녹말과 전기세"에 녹여버렸다. 이런 것도 헌신이라고 부른다면 헌신이다.

결과적으로 교황은 아무런 희망이 되지 못한 채 마을 사람들의 욕망만 부추기고 말았다. 교황이 시종일관 해맑게 미소짓는 동안, 착취와 가난의 현실에서 근근히 살던 이들은 과잉욕망이 만든 '거품'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거품이 차디차게 식고 난 뒤 무엇이 남는지를 날 것으로 보여준다.

누군가 내게 종교가 이 시대에 왜 필요한가 묻는다면, 나는 그것이 훌륭한 '연대'의 동기가 된다는 것을 꼽을 것이다. 그 연대의 정신은 욕망이 과잉으로 치닫지 않게 늘 성찰하는 힘을 준다. 너나 할 것 없이 욕망을 한껏 분출한다면 당연히도 힘과 돈을 가진 이의 폭력으로만 귀결된다는 점에서 종교는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복된 소식'이다. 그러나 교황이 늘 하듯이 '노동의 의미'와 '헌신에 대한 감사'를 늘어놓을 때, 영화는 종교가 정확히 반대로 작동하는 것을 보여준다. 도리어 교황의 희망은 메시아의 그것보다 외국자본이 주는 희망에 가깝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에게 저주한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마태23.13)

영화에서 인자한 미소의 교황이 설파한 교훈들이 답답하며 자연히 이솝 우화의 '소 여물통에서 잠자는 개'가 떠올랐다. 자기가 먹지도 않을 거면서도, 남도 먹지 못하게하는 고약한 심보다. 물론 그 고약함은 현실에 대한 철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일테다. TV 속에서 변기통을 들고 뛰어다니던 아빠의 옆에 게시된 교황의 말은 그래서 씁쓸한 희극의 무대장치가 된다.

국가는 부패하고, 언론은 호들갑을 떨고, 종교는 게다가 부채질하는 이 불우한 마을에서 그나마 현실을 날카롭게 보는 이는 딸 혼자다. 라디오 아나운서가 되겠다던 이 아이의 욕망은 '거품'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과잉으로 치닫지는 않는다. 오히려 공부를 위해 엄마가 모아놨던 돈이 아빠의 초조함 때문에 화장실로 고스란히 쏟아부어지는 것을 바라봐야했다. 영화의 마지막에 딸은 저널리스트가 될 수 없었지만, 저널리스트가 될 수 없는 현실을 고발한다는 점에서 진짜 저널리스트의 모습을 보였다.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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