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우 신부] 4월 19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사도 2,42-47; 1베드 1,3-9; 요한 20,19-31

무언가 아쉬움이 가득한 부활시기입니다. 평소엔 성당에 잘 나가지 못해도 부활 대축일만큼은 빠지지 않고 성당에 가려고 하는 분이 많지요. 그러나 올해 부활 대축일은 대부분의 교구가 ‘신자들과 함께하는 미사’ 제한 조치가 연장된 상태에서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아쉬움 속에서 부활 8부 축제의 마지막 날인 부활 제2주일을 맞이합니다. 

이날이 되면 적지 않은 분이 고해성사를 보러 고해소를 찾으십니다. 사순시기에 판공성사를 못 보신 분들인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시기에 일부러 고해소를 찾는 분들은 특별한 목적이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2000년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계명과 가르침을 신자들의 영혼에 깊이 심어 주시고자, 이 은총의 선물을 특별한 신심으로 기억하도록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2002년 이어, 교황께서는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심을 최대한 장려함으로써 풍성한 영적 열매를 맺게 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으로 고무되시어”(교황청 내사원 교령, 하느님의 자비를 기리는 신심 행위와 관련한 대사, 2002) 하느님 자비의 주일에 신자들이 전대사를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전대사를 얻을 수 있는 일반조건 중에 하나가 바로 고해성사입니다. 

사실 하느님 자비의 주일뿐만 아니라 보편적으로 전대사를 받기 위한 가장 큰 조건이 바로 고해성사와 영성체 그리고 교황님의 지향에 따른 기도입니다. 비록 많은 분이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를 받지 못하고 계신 것이 현실이지만 이 주일에 녹아 있는 하느님 자비에 대한 기억은 변함없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를 담아 주일 복음을 묵상하면서 그 출발점을 고해성사로 시작해 보았습니다. 고해성사를 준비하다 보면 ‘앞으로는 이렇게 살겠다’라는 결심을 많이 하게 됩니다. 내가 성사를 보고 난 뒤에는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 과거의 삶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하지요. 그런데 이러한 다짐만큼 중요한 것이 현재의 내 모습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죄에 빠져 있고 무엇이 부족한지를 아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점이지요. 신학생 시절 보았던 책에서 이런 구절을 만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넘어진 그 자리에서 우리를 일으키신다.’ 야곱이 하느님과 씨름하여 넘어진 그 자리에서 하느님을 대면한 것처럼 말입니다.(창세 32,26 이하 참조) 갑자기 새로움이 다가오진 않습니다. 내가 부족하고 서툰 그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새로움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의심하는 토마스', 렌더르트 판데르 코헌. (1654)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오늘 복음 역시 여러모로 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먼저 토마스를 바라보면 우리는 ‘그 자리’를 떠올릴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을 믿지 못하는 토마스는 자신이 의심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토마스에게 특별한 체험을 시켜 주기 위해서는 다른 곳이 나올 법도 한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요한 20,26) 있을 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더불어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그 모습 그대로’를 떠올리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깨끗하거나 꾸며진 모습이 아닙니다. 죽음을 이기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분답게 특별한 모습을 보여 주실 법도 한데 말입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수난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성사의 부재로 힘들어 하시는 교우분들께 오늘 2독서의 말씀이 희망이 되길 기도합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6-7) 이제 곧 성당으로 가서 미사와 고해성사를 볼 수 있는 날이 올 것 같습니다. 사제인 저 역시 그 날이 빨리 오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희망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자유롭게 성사를 배령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앞으로 신앙생활을 다시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도 있어야겠지만 지금의 내 모습을 먼저 바라보는 작업이 필요할 것입니다. 분명히 부족함과 서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넘어진 자리에서 우리를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 토마스에게 그가 의심했던 ‘그 자리에서’ 당신이 수난과 죽임을 당한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상처 ‘그 모습 그대로’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던 것처럼. 항상 새롭고 특별하지 못한 우리를 ‘그 자리 그 모습’에서 이끌어 새로움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부산교구 감물생태학습관 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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