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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Zoom) 시대의 부활절[신학 오디세이아 2 - 박정은]

아침 햇살이 좋은 부활의 아침, 나는 컴퓨터를 켜고 부활 대축일 미사를 드렸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로 수업을 온라인으로 하게 된 나는, 다락방에 아예 사무실을 꾸몄는데, 부활의 아침, 하늘로 향해 난 창문을 통해 보이는 나무들과 새들의 소리가 무척 정겨웠다. 미사에는 평소에 자주 만나지 못하던 졸업생들도 있어서, 채팅창에서 서로 반가운 인사를 띄우면서 미사를 드리는 것이 사실 재미있었다.

처음에는 과연 성주간의 장엄한 전례가 온라인으로 어떻게 진행될까 궁금하기도 하고, 또 걱정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성목요일 미사에서 친근한 얼굴들을 본 순간, 허술하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의 전례는 세족례마저 생략했고, 어찌 보면 지극히 단순한 미사였는데,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밤, 식탁에서 느꼈을 법한 그런 소박하고 친밀한 감동이 느껴졌다. 신부님은 이런저런 말을 하지 않으셨다. 그저 세상의 모든 아픔과 두려움을 봉헌하자고 하셨다. 사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렇게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을 줄 생각하지 못했다. 이전에는 기원전(BCE)과 기원후(CE) 대신 이제는 구글 전(BG) 인류와 구글 후(AG)의 인류로 나눈다고 농담을 했었는데, 이제는 한 발 더 나아가 밀레니엄 세대를 일컫는 Z세대는 Zoom세대(Z for Zoom)라는 이야기를 한다.

(줌은 미국 기업이 개발한 화상 회의, 온라인 회의, 채팅, 모바일 협업을 하나로 합친 원격 회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앱이다. -편집자 주)  

줌 성목요일 전례: 성만찬을 줌 버전으로 패러디한 사진인데, 사실 2020년 성목요일 전례는 이런 모습으로 진행되면서 기억에 남게 되었다. ⓒ박정은

성금요일에는 놀랍게도 지구 여기저기서 줌(Zoom) 전례 초대가 왔다. 그래서 콩고에서 바친 십자가 예절을 포함, 여러 전례를 참석할 수 있었다. 내게 가장 좋았던 십자가의 길은 메리놀 수도회에서 만든 것으로, 이번에는 생태와 경제를 다룬 십자가의 길이었다. 인간의 욕망이 낳은 과소비와 자연재해, 그리고 이민자의 고통, 노동자의 인권 문제들을 예수 수난의 길 위에서 함께 아파하며 기도했다. 그리고 늘 보던 친구들이 모인 학교 채플의 성금요일 예절도 좋았다. 그냥 침묵 속에, 스크린에 비친 친구들의 얼굴을 보면서, 십자가를 그들과 함께 응시하는 동안 같은 곳을 향해 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위안을 받았다.

밖은 바람이 많이 불었다. 잠시 산책을 하고 들어와, 조르주 루오의 동판화 '미제레레'를 묵상했다. 마침 어떤 분의 블로그에, 작품 58개와 제목을 모두 올려 놓아서, 감사하게 기도할 수 있었다. 루오는 1차 세계대전으로 고통받은 인류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았고, 아픔과 어둠 속에서 희망을 보았다. 역병이 창궐한 2020년의 성금요일을 지내며 바라본 미제레레는 아프고도 또 아름다웠다. 특히 22번 “어떤 일이 되었든, 척박한 땅에 씨를 뿌리는 아름다운 성소”는 내가 참 좋아하는 작품인데, 이번 성금요일에도, 이 작품을 묵상하면서, 큰 일은 못하겠지만, 내게 주신 일들을 성실하게 해 나가리라는 결심을 해 보았다.  

메리놀 공동체가 제작한 줌 십자가의 길. 트럼프타워 빌딩 앞에서 노동자들의 인권과 정의를 묵상하는 장면. ⓒ박정은

그리고 없음과 부재를 체험하는 성 토요일. 아무것도 없는, 그래서 철저히 희망하며 기다리는 날. 나는 교황님이 어느 잡지사와 한 인터뷰를 다시 찬찬히 읽어 보았다. 교황님은 지금 온 인류가 겪는 불행과 불안에 대해, 불확실성이란 말로 설명하고 계셨다. 부족한 병실과 의료 시설로 절망하며 많은 사람이 죽어 가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또 사실 누구도 이 역병이 얼마나 갈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교황님은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으로 기억할 것, 창의적일 것, 유대와 연대를 잃지 말 것을 권고하셨다. 어쩌면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는 불확실한 삶의 본질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기억하게 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현대인들에게 인간은 나약한 피조물이며, 인생은 한 토막 꿈과 같은 것임을 가르쳐 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신앙인은 고통을 안 겪는 사람들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삶의 본질을 보고, 불확실한 현실 너머로 영원을 감지하는 사람들임을 알려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주간을 보내고 부활 대축일 보내며 전례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늘 흠 없이 잘 짜여진 전례 교회가 사라진 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집 안에서, 그리고 불확실성 속에서, 아직은 어색한 온라인 전례를 드렸다. 함께 모이는 장소가 아니라 함께 만드는 공간에서 전례를 드린 것이다. 그런데 이 변화가 싫지 않았다. 이 변화는 마치 내게 기도는 좀 더 내면으로 들어가야 하며, 전례는 무언가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 “지금이 그때인데 그때가 오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를 경배할 것이다”(요한 4,23)가 자꾸 마음에 맴돈다. 부활 성야, 빛의 예절 때 밤공기를 가르며 풍기던 향 내음이나, 십자가 예절 때, 만지고 경배하는 십자가를 그리워하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전례의 새로운 감성을 만들어 가고 또 만나야 하는 것은 아닐까? 참된 경배를 위해서.

이런 때에도 봉사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표지. ⓒ박정은

그러고 보니, 이미 사람들은 창의적인 경배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사회적 거리 두기 속에서도 여전히 따스하게 소통하고 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창문에서 인사를 하는 것처럼 테디 베어 같은 인형들을 세워 놓았다. 그리고 무지개를 칠해서 대문에 붙여 놓은 집들도 많다. 무지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의료혜택을 받기를 기원하는 것이고, 유리창에 세워 놓은 인형들은, 이 어려운 시기에도 봉사하는 의료 종사자들, 우편 배달부, 식료품 점원, 약국, 그리고 미화원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는 신호다. 거리를 산책할 때도, 텅 빈 거리에서 어쩌다 마주치면,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서로 인사한다. 최소한 이런 힘든 시기를 같이 견뎌 가자는 연대의 신호들이다. 또 매일매일 재미난 이야기를 보내 주는 친구들도 있고, 페이스북에 자기는 화장지가 넉넉히 있으니 필요하면 알려 달라든가, 음식 넉넉히 있으니, 혹시 음식 필요하면 가져 가라는 광고도 있다. 배고픈 사람들, 집이 없는 사람들의 손을 잡는 것, 사소한 일상 너머에 자리한 하느님의 사랑을 만지는 것이 이 시대의 경배 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랑을 할 때, 창의적이 된다.

그리고 인형들. 거의 모든 집 창문에 인형이나 포스터가 붙어 있다. ⓒ박정은

이 부활절 아침, 우리는 사랑하는 벗들과 빈 무덤을 만났다. 빈 무덤은 부활의 빛 속에서 새롭게 생명을 살아가라는 초대다. 이제 다시 일상 너머로, 텅 빈 그 공간을 창의적으로 만나야 한다. 그 새로운 공간- 복음서가 새롭게 읽혀지고, 새로운 전례가 시도되는, 그 공간은 결코 지루할 새가 없으며, 틈새가 아주 많아야 한다. 그 틈새로 우리가 알지 못했던 하느님을 뵈올 것이다. 그러니 그 틈새들을 창의적으로 채워 가는 것이 우리의 소명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창의성은 사랑에서만 나온다. 그러니 예수 부활을 노래하는 우리 앞에 놓인 빈 무덤은, 갈릴래아 저잣거리 시장 통에서 사랑을 배워 보라는, 불확실성 속에서 생명을 선택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록빛 초대다.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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