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희망으로 바꾸게 되기를”

(편집 : 장기풍)

“두려움을 희망으로 바꾸게 되기를”

교종, 4월 8일 수요 일반 교리교육에서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4월 8일 수요 일반 교리교육 시간을 통해 현재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으로 인한 불안과 고통의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용기를 얻으라고 격려했다.

말씀 요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현재 코로나바이러스 전염병으로 인한 불안과 고통의 시기에 우리는 모두 불확실성에 직면하여 어디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 우리는 성주간을 통해 예수님 열정을 보며 위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그분이 약속된 메시아이신지 궁금해하는 많은 사람의 질문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십자가형을 집행했던 백부장이 예수님이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확인한 것은 예수님 죽음 이후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조용히 고통받는 것을 본 다음 이를 확신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능력이 겸손하고 자기희생적인 사랑으로 계시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옳은 것에 대한 우리 자신의 척도에 따라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주님의 힘을 나타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지상의 권세가 사라지는 동안 오직 사랑만이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연약함과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용기를 얻어 우리의 연약함을 포용하고, 우리의 죄를 치유하고, 우리를 그분께로 가까이 데려가 의심을 믿음으로 바꾸고 두려움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시다.

            

 “유다는 우리 마음 안에도 숨어 있다”

 교종, 4월 8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4월 8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 미사를 코로나 사태 속에서도 자신의 이익을 채우기 위해 빈곤층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회개로 이끌어 달라는 지향으로 봉헌했다. 교종은 이날 복음(마태 26,14-25), 즉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기고 배신한 유다에 관해 설명했다. 

강론 내용.

오늘 미사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유행하는 동안에도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궁핍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마피아, 고리대금업자 등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의 회개를 위해 봉헌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화 시켜 개심시키기를 기도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태오 복음 사가가 예수님의 제자 유다가 어떻게 대제사장들과 거래하여 은 30닢에 스승을 배반했는지 보여줍니다. 성주간 수요일(‘스파이 수요일’ 또는 ‘배신의 수요일’이라고도 부름)에 유다가 스승을 판 것은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의 노예거래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것은 오래전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오늘날에도 이라크와 시리아의 ISIS(이슬람국가) 그룹에서는 이라크 내 기독교 신자 어린이들을 매매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들의 형제자매들을 사들여 정당한 대가 없이 그들 일에 이용합니다. 그들은 가장 소중한 것도 매매합니다. 부모와 멀리 떨어져 ‘늙은이들’의 집을 안전하게 제거하고 더 보지 않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어머니까지 팔 수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부모가 오히려 안전하고 돌보아지기 때문에 평화를 느낍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 인신매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돈을 주인의 지위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은 하느님을 섬길 것이냐 돈의 노예가 될 것이냐”는 두 가지 선택을 주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하느님과 돈을 함께 섬기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척하면서 착취당하고 결핍한 사람들에 대해 무죄한 것으로 보이지만, 식탁 아래서 은밀히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에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인간의 착취는 이웃을 팔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다의 과거에 관해 잘 모릅니다. 아마도 그는 평범한 소년이었을 것입니다. 불안은 있었겠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첫 독서에서 말한 것처럼 ‘제자의 입과 마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바른 나사로의 집에서의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유다가 돈을 사랑했음을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 사가는 유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도둑이기 때문에 향수의 낭비를 비난했다고 설명합니다. 돈에 대한 사랑은 규칙을 넘어서며, 도둑질과 배신 사이에는 작은 발걸음만 있습니다. 돈을 너무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항상 더 많은 것을 갖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좋은 의도를 가진 좋은 소년이었던 유다는 결국 스승을 은화 서른 닢에 팔면서 반역자로 끝납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결코 유다를 개인적으로 ‘반역자’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를 ‘친구’라고 부르고 입을 맞춥니다. 이것이 유다의 비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배반자를 강하게 비판하십니다.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태 26, 24) 

예수님이 그를 ‘친구’라고 부른 것을 보면 유다가 지옥에 있는 것도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또 유다의 이야기는 악마가 모든 것을 약속하고 모든 것을 보여주고 결국 당신이 홀로 절망에 빠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코 악마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 탐욕과 예수님께 대한 사랑 사이에서 불안과 고통을 겪은 유다는 용서를 구하고 제사장들에게 돈을 돌려주려고 돌아왔지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바로 유다에게 한 것이 악마의 방식이며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 안에도 ‘작은 유다‘가 있습니다. 특히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착취하는 제도화된 유다입니다. 우리 각자는 배신하고 팔고, 자신의 이익을 선택하는 능력들이 있습니다. 또 우리 각자는 돈, 물품 또는 미래의 안녕에 대한 유혹에 끌리게 될 기회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배신하는 것이 현대사회의 표준이자 규칙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하느님께 대한 충성과 자신의 이익 가운데 선택해야 할 때입니다.

 

 “베드로 배신의 예는 우리 ‘영감의 원천’”
          
교종, 4월 7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4월 7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 미사를 박해 때문에 부당하게 선고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봉헌했다. 교종은 결백하신 예수님께서도 율법학자들과 부당한 법의 판결에 사냥을 당하셨다고 말했다. 또한 교종은 우리는 봉사를 하기 위해 선택되었음을 잊지 말자고 강조했다. 

강론 내용.

우리는 모두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이사야 49,1-6) 이사야 예언서는 메시아와 하느님의 백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메시아를 보내시기 전에 선지자를 선택했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우리 각자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봉사하는 사람으로 선택됩니다. 우연히 이 세상에 나온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자유와 운명이 있습니다. 운명은 하느님의 선택입니다. 나는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는 하느님의 종이 되도록 선택되었습니다. 봉사하는 것이 봉사 받는 것보다 다른 혜택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종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봉사의 모범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에 대한 봉사는 십자가상에서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패배처럼 보였지만 봉사의 길이었습니다. 하느님 백성이 봉사하는 태도에서 멀어질 때 그들은 배교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종종 우상숭배하고 그들의 선택된 삶에서 벗어난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택하시고 그분의 종으로 기름 부으신 하느님 앞에서의 우리의 태도입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타락했습니다. 베드로의 배신의 예는 우리들의 ‘영감의 원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수탉이 울면서, 그도 울부짖었습니다.(마태 26, 75) 이것이 미끄러져 넘어질 때 용서를 구하는 ‘종의 길’입니다.

이 외의 다른 길은 자신이 타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해할 수 없는 종의 길입니다. 이 길은 우상숭배로 이어지는 열정에 마음을 열어둡니다. 유다처럼 마음이 사탄에게 열려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기까지 봉사에 충실한 예수님을 생각합시다. 우리는 직업으로서 교회에 봉사하고 이익을 얻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베드로처럼 미끄러져 넘어질 때 울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태도가 심판의 기준”

교종, 4월 6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4월 6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 미사를 전 세계 여러 지역의 과밀한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들을 위해 봉헌했다. 또 교종은 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판단하실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론내용.

현재와 같은 코로나 전염병 시기에는 과밀한 곳에서 더욱 심각한 비극이 생길 위험이 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책임 있는 사람들과 이 분야에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들에게 과밀한 상태인 교도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확하고 창의적인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오늘 복음(요한 12,1-11)에는 나자로와 마르타의 자매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리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7-8)라는 수수께끼 같은 반응으로 그곳에 모여든 유다인들에게 분개하는 반응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있습니다. 특히 제자인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걱정한 것은 돈이었습니다. 그는 돈을 관리하는 도둑이었습니다. 이런 특성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있습니다. 충실하지 않은 관리자에 관한 이야기는 늘 있는 일입니다. 그들은 항상 높은 수준에 있습니다. 직원 수가 많은 자선단체 또는 인도주의 단체에도 있습니다. 그들 단체의 평균 60퍼센트가 급여로 지출되기 때문에 기부금의 약 40퍼센트만 빈곤층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돈을 착취하는 방법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항상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대다수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즉, 숨겨진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무관심의 문화에 젖어 들어 그들의 존재를 부인하기 때문에 보지 못할 뿐입니다. 

“아니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많이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을 최소화할 뿐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많습니다. 빈민의 존재에 무관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을 도시의 장식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경제 시스템의 피해자들입니다.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경제 및 금융 시스템의 희생자들이지만 도움을 요청하기에는 너무 창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직업이 있어도 월말까지 버텨나가기 힘들어합니다. 

제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로 있을 때입니다. 한 번은 누군가가 지난 몇 달 동안 15가구가 살았던 버려진 공장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그곳에 가 보았습니다. 자녀들이 있는 가족들이었으며, 각자 공장의 일부에서 살겠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가정이 중산층임을 나타내는 좋은 가구와 텔레비전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임대료를 지불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여유가 없기 때문에 집을 떠나야 했던 새로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경제 또는 금융 시스템의 불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심판의 날에 주님의 첫 번째 질문은 “당신은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당신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습니까?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방문했습니까? 과부와 고아를 도와주었습니까? 내가 항상 거기에 있었습니다.“(마태 25.31-46) 우리의 최후의 심판은 가난한 사람들과의 관계에 따라 판단될 것입니다. 내가 오늘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들을 버리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주님께서는 심판의 날에 나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이것은 공산주의자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심판받을 것입니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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