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탑, 바벨’을 보고

한 편의 연극으로 시대와 사회를 통렬히 비판한다

일가족 4명을 죽인 범인이 한강에 투신해 자살. 암매장 된 일가족 사체 발견. 한반도 대운하 물류 집하장 예정지에 땅값 보상 노리고 비닐하우스밭에 나무 심어-땅주인 외지인이 대부분, 땅 부쳐 먹고살던 소작인들 졸지에 삶의 터전 잃어...

한반도 대운하 반대 서울대 교수 모임 전국 교수회 조직화, 불교계 공식 반대 입장 표명, 대운하 예정지 따라 불교 사찰 100여개,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 110여점 있어, 종교인 중심 생명의 강을 섬기는 사람들 도보 순례...

교황청 ‘新 7대 죄악’ 제시... 환경 파괴, DNA조작, 소수에 의한 과도한 부의 축재로 인한 사회적 불공정, 낙태 등등.

오늘 아침을 장식한 뉴스들이 마치 연극의 대사처럼 들린다. 연극 ‘탑, 바벨’에서 장군은 백성들을 선동해 하늘에 닿는 탑을 건설하자고 한다. 그는 외친다 “쉽지 않은 것은 없다, 우리가 신이 되면 그만이다. 탑을 쌓자!” 라고.

바벨탑의 의미를 곡해하고 망각하는 군상들

이 시대의 바벨 탑은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연극 한 편이 2월 29일부터 3월 9일까지 서울 강남구 논현동 성암아트센터에서 공연됐다. 한국 가톨릭문화원 전문연극인 극단 ‘앗숨’ 다섯 번째 창작 공연으로 무대에 오른 ‘탑, 바벨’은 변영국 (토마스 아퀴나스)씨가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았다.

작품을 만든 변영국씨는 오늘날 현실을 두고 이대로 가다간 또 한 번의 무서운 형벌을 피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대본을 썼다고 말한다.

“바벨탑을 쌓은 인간들에게 하느님이 내리신 형벌의 언외언(言外言)을 읽어야 한다. 그 형벌의 정체는 불신이며 증오다. 물신주의이며 출세지향주의다. 그리고 오늘날 바벨탑은 여기저기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또는 지역 이기주의와 강대국을 향한 사대주의에 천착해 성공을 쫒고 부를 쫒으면서 정작 중요한 것들을 간과하고 있다. 행복에 이르는 진정한 길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스스로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하고서 말이다. 작가는 “바벨탑의 의미를 곡해하고 망각하는 군상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나 역시 그 군상의 일원이 되어가는 끔찍하고도 두려운 현실 때문에 발악하듯 만든 연극이 이것이다.”라고 말한다.

무대 위, 불이 밝혀지자 8명의 배우들이 제 각각의 몸짓으로 말을 하기 시작한다. 검은 옷을 입은 배우들의 안무는 갈수록 거칠어지고, 그 숨 막히는 듯한 몸놀림은 마치 소통이 단절된 현실을 반영하는 듯 하다.

우리 시대 바벨탑

구약의 역사는 인간이 저지르는 끊임없는 죄악과 하느님의 징벌, 그리고 회개와 용서로 이어지는 하느님의 자비를 말하고 있다. 마치 지금 나의 역사처럼. 연극을 보면서 나의 바벨탑은 무엇이고, 우리 시대의 바벨탑은 과연 무엇일까를 내내 생각했다.

‘노아는 살아남았다. 다른 모든 이들의 죽음을 딛고......’ 이것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극의 전제 조건이다.

노아의 손자 니므롯은 조부의 ‘살아남음’ 보다는 나머지 사람들의 ‘죽음’에 더 몸서리를 친다. 스스로 선택되었다는 사실 보다 스스로가 선택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비명횡사했다는 사실을 더 크게 받아들인다.

니므롯의 아버지는 부친인 노아처럼 거룩한 야훼를 잘 섬겼다. 니므롯의 어머니가 죽을 때도 아버지는 지성소에서 나오지 않는다. 니므롯은 그것을 현실을 외면한 신앙으로 정의한다. 그는 그렇게 태생적으로 상처를 안고 있다.

대제사장인 아버지와 장로를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보고 대항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결국 반역의 탑을 만든다. 작가는 이 부분에서 “말하자면 방법이 틀렸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탑 쌓기는 오로지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명분도 합의도 이끌어 내지 못한 채.

지금의 사람들은 무엇인가. 반역이 뭔지, 살아남음과 죽음의 의미가 뭔지, 그 무엇보다도, 과연 자신이 선택되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최소한의 고민도 없이 이제 그저 탑을 쌓는다. 방법이고 목적이고 없다. 살아있음이 결국 맹목이 되고 만 것은 아닌가?

최소한의 고민도 없이, 그저 탑을 쌓는다

다시 연극을 들여다 보자.

하지만 벽돌을 구울 수 없다. 역청은 불이 꺼지면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벽돌은 구워내자마자 갈라져 버린다. 그에게는 역청을 다루는 기술도, 벽돌을 만들어 내는 기술도 없지만, 기술자에게 고개를 숙이기 원치 않는다.

장로의 아들, 그러니까 니므롯의 처남인 단은 이 시대 최고의 장인이다. 하지만 둘의 사이는 앙숙이다. 이제 니므롯의 선동에 넘어간 백성들은 오직 탑 쌓기에 혈안이 돼 있고, 벽돌과 역청이 제 때 공급되지 않으면 폭도로 변할 수도 있다. 니므롯은 점차 궁지에 몰리게 된다.

그런 니므롯을 향해 아버지인 족장과 장인인 장로는 간곡히 저지한다. “보리라. 스스로 보리라. 길이 아닌 길을 가려 하는데...”

그들을 향해 니므롯은 “무언가 달라야 성공할 수 있다”면서 결국 단을 협박해 벽돌을 굽게 만드는데, 아들 단의 발길을 붙들지 못한 니므롯의 장인은 목을 매 자살하고, 족장이자 대사제인 니므롯의 아버지도 탑 쌓기에 혈안이 된 니므롯의 부하 칼에 찔려 숨진다.

극은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다.
“늦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구나. 다그치는 주변의 눈길이 느껴진다.” 이미 니므롯은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길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이 얼마나 많이 열려 있었던가. 하지만 집착이 일을 그르쳤다. 비단 그것은 연극 속의 니므롯에게만 해당하는 사안은 아니다. 우리 모두,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피를 흘리면서도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봐야 한다. 무엇이 장로를, 무엇이 족장을 죽음으로 이끌었는지, 그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니므롯은 아버지의 죽음을 앞세워 “자, 이제 탑을 쌓자. 야훼께서도 우리를 막지 못한다”라고 절규를 한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대사는 공허했다.

두려움을 감춘 채 교만과 독선의 절규를 우리는 매 순간 내뱉고 있지는 않은가? “하느님도 우리를 막지 못한다”라고. 그렇다. 그의 말대로 하느님은 눈감고 귀를 닫은 채, 자신들의 욕심만을 외쳐대는 인간 군상들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시대를 지켜보다가 하느님은 무엇을 하실까? 작가는 두렵다고 한다. 나 역시 두렵다.

작가 변영국씨는 “나는 ‘이 시대는 무시무시한 바벨탑을 쌓고 있다’는 얘기를 희곡으로 썼고 그것을 이번에 연극으로 올렸다.”라고 말한다.

그가 말한 ‘무시무시한 바벨탑’ 은 무엇일까? 무소불위의 권력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대세라고 믿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구조의 막강한 구조틀은 곧 무너져 버릴 이시대의 바벨탑은 아닐까? 니므롯의 절규처럼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구나. 다그치는 주변의 눈길이 느껴진다”면서 파국으로 치닫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닐까? 대운하가 이 시대의 바벨탑이 아니기를 진정 바란다.

‘탑, 바벨’은 한 편의 연극 속에 담긴 이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발이자 탐욕으로 얼룩진 우리네 자화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상인숙 2008.03.19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