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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여된 희망, 코로나19와 가난의 자리[인연 - 김우중 수사]
이 글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웹진 <인연>에 실린 글입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3월 초 필리핀에서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아직 두 자릿수였던 때 메트로 마닐라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중순쯤에는 마닐라가 있는 루손섬이 봉쇄되었고, 모든 집회와 미사도 중지되었다. 대중교통도 끊겼다. 이어서 외국인의 입국이 금지되었고, 저녁 8시 이후 야간통행 금지령이 떨어졌다. 이른바 락다운(Lockdown) 상태로 들어간 것이다. 처음 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당연하고도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했다. 다소 불편함은 있겠지만 의료시설이 부족한 필리핀에서는 오히려 늦은 감마저 들었다.

마침 공동체 당가신부님이 부재중이라 재정 부분을 담당하게 되었다.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며 상황이 장기화될 것을 고려하여 공동체 예산을 책정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안도감마저 들었다. 적어도 어느 필리핀 주교님의 페이스북을 접하기 전까지는.

그분은 칼로오칸(Kalookan) 교구장이신 파블로 비르질리오 S. 데이빗(Pablo Virgilio Siongco David) 주교님으로 흔히 닉네임으로 서로를 부르는 필리핀 문화에 따라 사람들은 그분을 Ambo 주교님이라 부른다. 칼로오칸 교구는 칼로오칸시 남부와 말라본시, 나보타스시를 관할하고 있으며, 이중 나보타스는 한국 예수회 수사를 비롯하여 많은 연학수사들이 방문하는 대표적인 빈민 지역이다. 주교님은 가난한 이들의 입장에서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발언을 자주 하므로 실질적인 위협도 받는 분이다. 그분을 통해 필리핀 교회에 대한 희망을 느낀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필리핀 도시 빈민 지역. (사진 출처 = Ambo 주교 페이스북)

지난 3월 16일 주교님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제목은 ‘How do we apply concepts like “LOCKDOWN” & “COMMUNITY QUARANTINE” in the Non-First World setting?’(“락다운”과 “지역사회 격리조치”와 같은 개념을 제 1세계가 아닌 곳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이었다. 락다운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였던지라 머리가 뒤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필리핀은 하루 벌이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주요 대중교통 수단인 지프니(미군이 남긴 지프 차량을 개조하여 만든 대중교통수단)와 트라이시클(오토바이에 사이드카가 부착된 필리핀의 주요 교통수단) 운전사들은 물론이고, 주일 미사 참석자들에게 양초와 묵주 등을 팔며 근근이 먹고 사는 사람들의 생계가 모두 끊겼다. 구걸도 할 수 없다. 정부에서는 주민들에게 식료품을 배급하겠다고 하지만, 주교님에 따르면 도시 빈민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10-20퍼센트는 아예 주민등록조차 안 되어 있다고 한다. 조그만 방 하나에서 여러 명의 식구가 모여 사는 빈민가에서 ‘사회적 거리’ 유지는 불가능하다. 소독제와 마스크는 그들에게 사치나 다름없다. 굶주림은 그들에게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이 와중에 외국 수사들의 영어교사인 한 평신도 여성은 직접 음식을 준비해서 가난한 아이들에게 나눠 주고 있다. 공동체 차원에서 그분에게 약간의 금전적 지원을 하기로 하여 만날 기회가 생겼다. 공동체가 있는 대학교 밖을 벗어날 수 없기에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거리를 둔 채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신도 두렵고 떨린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가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학교 경비 한 명이 이 모습을 보고 얼른 돌아가라는 경고를 보냈다. 서둘러 인사를 나누고 공동체로 돌아왔다. 온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학교가 속한 행정구역인 케손시티(Quezon City)에서 배고픔을 참다못한 사람들이 시위를 벌이다 연행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그는 최전선에 있고 나는 안전한 후방에 있는 느낌이다.

걸어 잠긴 학교 출입구. ⓒ김우중

SNS에는 희망을 노래하는 메시지들이 공유되고 있다. 어떤 글들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대충 내용은 이러하다. 도시에 새소리가 들리고, 하늘이 맑아졌다는 것이다. 격리되어 외롭지만 자기를 돌아보고 상처가 치유되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맞다. 정말 그러하다. 적어도 제 1세계, The First World에서는.

결국, 코로나는 종식될 것이다. 격리가 끝나 사람들은 큰 해방감을 만끽할 것이다. 더욱 맑아진 공기와 깨끗해진 강과 바다를 보며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욕심에 사로잡혀 살아왔는지 반성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치유와 성찰이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런데, 가난한 이들은?

가난한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목숨을 건 생존의 시간이다. 긍정적인 태도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관점에서 그런 태도를 취하는지는 중요하다. 가난한 이들의 관점이 아니라 집에서 한동안 머물러도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있는 국가 또는 그러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긍정은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그렇다고 애써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많았던 것처럼 행동하고 싶지는 않다. 나도 한국에만 있었다면 이런 생각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으로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을 해 왔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의 실천에서 그 편을 먼저 선택하는 특별한 형태의 우선”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전통 전체가 이에 관한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베네딕토 16세의 가르침대로, 이 선택은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신 하느님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포함된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바랍니다."(교황 프란치스코, '복음의 기쁨', 198항)

필리핀 도시 빈민 지역. (사진 출처 = Ambo 주교 페이스북)

희망 없이는 신앙도 없다. 그리스도인은 그 희망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는다. 우리 희망의 근거이자 중심인 예수께서 친히 가난한 이가 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가난한 이들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복음적 가치에 힘을 싣기 어려운 현실에 마음이 아프다. 바이러스가 전파된 것은 해외를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 여유를 지닌 사람들에 의해서이지만, 그 피해를 가장 크게 입는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이라는 성토가 들려온다.

나도 희망을 노래하고 싶다. 가난한 이들이 중심이 되는 세상,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를 희망하고 싶다. 그리고 반성한다. 가난한 이들을 배제한 채 희망을 노래해 온 나 자신을.

김우중 수사(스테파노)

필리핀 마닐라 Loyola School of Theology 신학 과정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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