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일민미술관 '청소년 - The Image of Youth' 전에 다녀와서

노는 법을 모르는 아이

얼마 전에 기말 시험이 끝난 중학교 1학년에 다니는 조카를 만났다.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주 보지 못한 아이를 몇 달 만에 보았다. 제 엄마야 아이한테 필요한 것 외에는 깐깐하게 굴 테니 그런 데서는 그저 너그러운 이모의 인품을 보여 주마 하고 생각했다. 그래야 요즘 유행하는 옷가지와 학용품이 다지만, 아이는 비싼 옷 하나보다는 싼 옷 여러 개가 아직 성장하는 자기로서는 좋은 선택이라고 제 딴은 제법 실용주의적인 말을 해 나를 웃게 하였다.

그러더니 아이가 “아, 심심해! 시험이 끝나고 나니 시간이 남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한다.

“친구들하고 놀지! 시험 때문에 책도 못 봤을 테니 책도 읽고.”

학교에서는 시간표대로, 집에서는 시험공부 일정대로 움직이던 아이는 시험이 끝나고 생긴 시간을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친구 만나면 분식집 가서 군것질 하고 용돈이 좀 생기면 지하상가 가서 저희 마음에 맞는 옷 사고…. 그러고는 더 무엇을 할지 몰라 했다.

사실 시간이 나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는 것 말고 다른 무엇을 즐길지 모르는 것은 어른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생동감 넘치는 아이가 분식집 가고 지하상가에서 옷 사는 것 말고는 다른 놀이를 모른다니…. 

우리 참 불쌍하다. 그치

저녁 무렵 집 앞에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에 갔다. 운동하는 사람들보다 산책하듯이 천천히 걷는 몇몇의 사람들로 한산한 운동장에 교복을 입은 여학생 둘이 그네에 몸을 맡긴 채 심드렁하게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운동장을 천천히 돌아 여학생들이 있는 데쯤 오자 아이들이 하는 말이 들렸다.

“이제 뭐 하지! 우리 참 불쌍하다. 그치!”
“그러게. 이제 뭐하지?”

가슴이 답답했다. 어른들이 당혹할 정도로 세상이 다 내 것이라는 방만함과 결기가 살아있어야 하는 아이들이 자신을 보면서 불쌍하다고 하다니.

유치원에 다닐 때 조카아이들은 맹랑하다 싶을 정도로 당돌했다. 눈에 보이고 느낀 대로 이야기를 해서 속으로 짐짓 당황해하곤 했다.

“이모는 삼촌이랑 큰소리로 다투면서 왜 우리가 싸운다고 야단을 쳐!”
“이모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왜 우리한테는 자꾸만 (이것저것) 하라고 그래.” 등등.

아이들은 어른들의 언행불일치를 보면서 제가 느끼는 것을 거리낌 없이 말했다. 그러던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 학교의 훈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사람(?)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중학교 가면서는 어른들의 부조리함에 입을 다물었다. 아이는 잘 길들여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가서는 아예 그러한 부조리함마저 못 느끼는 것 같았다. 교사가 학생한테 싸대기를 올려도 아이는 부당하다고 생각하기보다 힘센 사람(교사)이 힘없는 사람(학생)한테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이는 마냥 어른들 사회에 길들여지면서 생동감을 잃어갔다. 

그들에게 학교는 이미 학교가 아니다

지난 6월에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아연실색하였다. 제목은 ‘용서받지 못한 제자의 맞폭행’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서울의 한 과학고등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조기졸업을 위해 체력수행평가를 받는 시험장에 늦게 도착했고, 담당 교사의 제지를 받으면서 일어났다. 자기 차례가 되어도 부르지 않자 교사에게 “왜 안 부르는데?” 하며 반말로 항의를 하였고 교사는 시험에 방해가 되니 비켜 있으라고 하였다. 이런 실랑이 속에서 학생이 계속 항의를 하자 교사는 출석부로 학생의 머리를 내리쳤고 학생은 맞받아서 교사의 뺨을 때렸다. 격분한 교사가 학생의 얼굴과 배 등을 무차별로 때려 전치 12주의 상처를 입혔다.

교사는 폭행 혐의로 입건됐고 학교 측은 대학에 합격해 졸업을 앞둔 학생에게 특별교육 이수 처분을 내렸다. 그러자 학생은 자신이 한 행동을 “폭행이 아니라 정당방위였고, 징계 역시 학교 측의 재량권 남용”이라며 소송을 냈다. 이에 재판부는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리면서 “교사가 출석부로 머리를 때린 것은 잘못이나 그렇다고 원고가 교사의 뺨을 때린 것이 정당방위라고 볼 수도 없다.”고 판단했다.

힘으로 거칠게 학생을 제어한 교사도, 정당방위라며 항의하는 학생도, 그들에게 학교는 이미 학교가 아니다. 그곳은 배우고 가르치는 곳[學校]이 아니다. 그저 순서대로 밟아 올라가야 할 과정을 치르는 곳일 뿐. 

청소년-The Image of Youth’

서울 세종로 일민미술관에서 지난 6월 19일부터 열리는 ‘청소년-The Image of Youth’(2009.6.19~8.23.) 사진전을 보면서 가슴이 찡했다. 생기발랄함보다는 우울함이 배어나오는 청소년들의 모습은, 그들 미래의 일상에 있는 나한테는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실낙원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이들은 발랄하기보다는 피곤하다. 비록 사진에 드러난 급훈은 ‘생긴 대로 당당히 살고 배운 대로 서로 나누세’이지만 아이들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 동안은 단 하루 대학수학능력시험(박진영 사진)을 위해 산다. 그것은 ‘우리, 함께 가자!’라기보다는 ‘내가 먼저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다.

사진기를 바라보며 아이들은 웃는다. 아이들 너머 학교건물은 잿빛 하얀빛의 수직 수평으로 획일적이다. 마치 수용시설 같은 그곳에서 함양된 정서란 과연 어떤 것일까? 그곳에서 아이들은 12년이라는 긴 세월을 저당 잡혀 살아야 한다. 천원짜리 티를 걸치고도 그 에너지로 말미암아 환하게 빛나야 하는 아이들은 20만 원이 넘는 교복을 입어도 그 빛을 발산하지 못한다. 왜 교복과 학교는 아이들을 빛나게 하지 못하고 가둬두는 느낌을 갖게 하는 걸까? 늦은 밤, 바깥세상은 깜깜한데 환하게 전등불을 밝힌 교실 안에 갇힌 우리 아이들은 무엇을 하며 놀까?

교복과 교정 안에 갇힌 아이들은 세상을 보지 못한다. 생각하는 힘보다는 순종하는 것을 배우고 아이들은 마치 자동인형처럼 세상이 말하는 규칙과 질서대로 움직인다. 당돌함과 저돌적인 힘을 잃어버린 아이들은 어른도 아이도 아니다. 잿빛 시간에 갇혀 잿빛 세상만을 보면서 사는 우리 아이들.

우리, 정말 이대로 괜찮은가?

그래서 대안학교가 꿈틀댄다고 사진은 말한다. “여러 유형의 친구들이 대안학교에 입학한다. 너무나 특이한 아이, 학교생활에 문제가 있는 아이, 성장기 다른 사람들과 달라 학업 성취가 늦는 아이 등 여러 유형의 아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면서 학교생활을 한다.”고 사진은 말한다.

대안의 특징이 다양성이라면 그 다양성이 체제 속으로 들어와 또 다른 대안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안은 대안일 뿐이다.

아홉 명의 사진작가(사진가, 아마추어 작가 교사 등)가 보여준 ‘청소년-The Image of Youth' 전은 다층적인 청소년의 모습을 너무 문제적인 시각으로만 확대해서 본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편향적인 모습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그 수많은 메시지들이 아우성치듯이 달려든다. 병영화된, 오래 전 내가 다니던 중고등학교 시절과 별반 달라진 모습이 아니라니…. 사회는 진보한다(요즘은 그 구도마저 거꾸로 가지만)고 하면서도 우리 아이들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게 아닐까? 힘차게 밖으로 뻗어나가려는 아이들을 주저앉혀 안으로 위축시키는 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어른이 과연 있을까?

아이들이 자신의 초상을 보며 길을 묻는다. “우리, 정말 이대로 괜찮은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청소년(靑少年)

기간 2009-06-19~2009-08-23 장소 일민미술관 

청소년 문화의 현재를 살피는 일민문화재단의 네 번째 시각문화총서 ‘靑少年’ 발간과 함께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가들의 전시가 열린다. 강재구, 권우열, 고정남, 박진영, 오석근, 양재광, 이지연, 최은식, 최종규 등 9명의 사진가는 ‘우리나라에 청소년문화가 있는가’라는 질문 아래 약 7개월 동안 한국 청소년의 사회와 일상, 문화를 촬영했다. (02-2020-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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